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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누정문화의 재조명(4)-침수정검소하고 정결한 마음을 품고 학문에 정진하겠노라
서성우 호남지방문헌연구소 연구원  |  siminsori@siminso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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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9.29  14:2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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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수정에 걸린 현판 모습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우봉리 마을에 들어서면 마을 뒷산인 금오산자락 중턱에 침수정이 자리하고 있다. 이 정자는 팔우(八愚) 홍경고(洪景古, 1645~1699)가 17세기 말에 건립한 것으로 전하며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침수정에서 앞을 바라다보면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어 시원함과 함게 편안함을 전해주어 정감이 간다.

팔우 홍경고는 미수(眉叟) 허목(許穆)과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문인으로, 두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과 문장, 덕의와 풍절을 익혔다. 또한 지방의 수령 등이 교대로 소장을 올려 천거하였는데도 은자의 삶을 택하여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정자의 이름인 ‘침수(枕漱)’는『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중국 촉나라의 손자형(孫子荊)이 잠시 은거했을 때 “돌을 베개 삼고 흐르는 물로 양치했다는〔수석침류(漱石枕流)〕” 고사에서 비롯된다. 즉 그는 검소하고 정결한 생활과 함께 학문에 정진하겠노라는 뜻을 품고 이곳에 정자를 짓고 강학하며 수양 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행주(幸州) 기우만(奇宇萬)의 <침수정기(枕漱亭記)>과 그의 6세손 홍채주(洪埰周)의 <침수정중건기(枕漱亭重建記)> 등에도 잘 나타나 있다. 아래는 기우만의 <침수정기>의 내용을 일부이다.

 

   
▲ 송사 기우만의 침수정기

금오산(金鰲山)의 발치 수석의 구역 내에 옛 침수정(枕漱亭)이 있었는데 팔우공(八愚公)이 지었다. 곰곰히 침수의 뜻을 생각하니 돌을 베개로 삼고 물로 양치질 한 것으로 삼았으나 손자형(孫子荊)으로부터 말을 반대로 서로 해학하며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고 돌로 양치질한다고 한 것이 후세에 명담이 되었다. 팔우공이 정자 이름을 지은 뜻 또한 그렇다면 침수는 말을 반대로 한 것이 되니 어질고 어리석음만은 말을 반대로 할 수 없었겠는가? 그렇다면 공은 이미 현명하니 현명함과 반대로 하여 어리석음이 되는 것 또한 침수로써 유추할 수 있다. 이 정자에 올라오면 흐르는 물을 베개로 할 수 없고 돌로 양치질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니 또한 공이 어리석지 않아 귀를 씻고 이를 닦는다는 것을 알 것이다. 더욱 공의 수신(修身)과 치국(治國)의 실상을 보게 될 것이다. 정자가 오래되어 폐허되니 육세손인 봉남거사(鳳南居士)가 팔우공의 후손되는 분들과 함께 모의하여 중수(重修)하였다. 대체로 땅의 형세가 예전보다 조금 변하여진 것은 집터가 깊숙하여 높은 데로 옮겨 세운 것인데 혹시 이로 인하여 혐의 될 것인가? 아! 수석은 변함이 없으니 오는 사람들마다 나는 베개를 벨 것이고 나는 양치질을 할 것이라는 것이 동일하지는 않으나 수석에는 손해 될 것이 없으니 어찌 오직 이뿐이겠는가?

                                                                                                                  기우만의 <침수정기> 중에서

 

침수정은 팔우 홍경고가 생을 마감한 후에 타인의 소유로 넘어갔다가 1879년에 풍산 홍씨 후손들에 의해 다시 문중 소유로 돌아오게 되었고, 1885년인 을유년에 중건되었다. 이러한 사연의 전말은 중건에 힘쓴 6세손 홍채주(洪埰周)의 <침수정중건기(枕漱亭重建記)>에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 6세손 홍채주의 침수정중건기

아! 도는 때에 쓰지도 못하고 학문은 사람에게 전해지지 못하며 죽은 뒤 몇 세대가 되지 않아 자손이 몰락해지고 정자도 따라서 폐허되어 다른 사람에게 점거되었으나 탈 없는 것은 오직 한 편액의 세 글자일 뿐이다. 잠재된 빛과 은미한 덕이 장차 자연의 뜬구름과 함께 산일(散佚)된 것에 임하였는가? 부군께서 돌아가신지 181년만인 기묘년(1879)에 유허지를 남에게서 환수하고 7년을 넘긴 을유년(1885)에 문중의 의논을 함께하여 중건할 것을 모의하였다. 유허지가 마을에서 가깝고 조금 북쪽 시원스러운 곳으로 나아가 새롭게 지으니 그 전의 그윽하고 고요한 것에는 못 미친 것처럼 보이나 툭 트여진 것은 그보다 지나쳐서 능주 백리에 안개와 구름, 대나무, 시내, 산, 바람, 햇볕이 모두 모습을 나타내지 않음이 없었다. 비록 그러나 부군께서 일찍 경영하기 시작한 것은 어찌 빼어난 조망(眺望)과 한가한 즐거움만 취했겠는가? 진실로 도를 강학하고 덕을 수양하는 곳으로 삼으려고 지은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정자를 지은 것도 어찌 또한 한갓 그렇겠는가? 여기에서 강학하고 수양하며, 여기에서 노닐고 수양하면서 부군의 뜻을 잇고 부군의 도를 전하면 한 지역의 정자가 더욱 빛날 것이고 정자를 지었다는 한 구절로 우리의 일이 이미 끝났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더군다나 사람과 땅에 부합되고 지역과 인정에 칭송된다면 바야흐로 정자가 있다 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정자가 없는 것과 같을 것이다.

                                                                                                    6세손 홍채주의 <침수정중건기> 중에서

 

침수정이 있었던 자리는 현재의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어딘가에 있었다. 누가, 어떠한 일로 인해 침수정이 타인에게 넘어갔는지는 밝히고 있지는 않다. 다만 1879년에 후손들이 재구입하여 1885년에 후손들에 의해 마을에 가깝고 전망이 좋은 곳을 찾다가, 현재의 그곳에 중건한 것으로 보인다. 위의 마지막 부분의 내용인 “정자를 지은 것으로 우리의 일이 끝났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고, 사람과 땅에 부합되고 지역과 인정에 칭송된다면 정자가 있다고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정자가 있어도 없는 것과 같다” 는 그의 마지막 구절은 그들의 후손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도 귀감이 되는 내용인 듯하다.

정내에 가득히 걸려 있는 39개의 현판들

현재 정내에는 침수정이 새겨진 편액을 비롯하여 송사 기우만의 <침수정기>, 6세손 홍채주의 <침수정중건기>, 7세손 우흡(祐洽)의 <중건침수정서(重建枕漱亭序)>, 봉성(鳳城) 정재효(鄭在孝)의 <중수인(重修引)>과 연안(延安) 이만교(李萬敎), 만회(晩晦) 이병일(李秉一), 종인(宗人) 홍우경(洪祐慶), 강산(剛山) 이수홍(李秀洪), 팔계(八溪) 정재규(鄭載圭), 당악(棠岳) 윤관하(尹觀夏), 묵와(默窩) 윤자현(尹滋鉉), 규산(圭山) 정규섭(鄭圭燮), 후손 정모(珽謨), 승달(承達) 등의 시문이 새겨진 현판이 총 39개로, 정자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렇게 많은 현판들이 정자에 걸려있다는 것은 후손을 비롯한 지역민들이 지금까지 잘 보존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한데, 앞으로도 잘 유지되어야 하는 . 이중 몇 개의 작품을 감상해본다.

 

   
▲ 강산 이수홍의 작품

침수정 높다보니 한 점 티끌도 끊겼으니/枕漱亭高絶點塵

시내와 산은 여전히 한 백년 봄이로구나/溪山依舊百年春

여기 올라보면 절로 천년을 전할 만한데/登臨自足傳千世

시 읊으며 어이 제 한 몸만 다스렸겠는가/嘯詠何曾濟一身

끝없이 맑은 강에 마을 모습 넉넉해 뵈고/淸江不盡村容富

끝닿은 데 없는 방초에 들 빛이 새롭구나/芳艸無邊野色新

가을바람에 멀리 중수를 송축한 시 부치니/秋風遠寄重修頌

머지않은 나들이는 분명한 이유 있는 게지/早晩吾遊定有因

                                         교리(校理) 강산(剛山) 이수홍(李秀洪)

 

   
▲ 유초 양경묵의 작품

초산의 고상한 자취 세속 끊고서/楚山高躅絶囂塵

한가로이 침수하며 몇 해나 보냈나/枕漱閑安度幾春

대지 가득 강호가 마음에 쏙 드니/滿地江湖粧點意

뜬 구름 같은 부귀는 상관없을 터/浮雲富貴不關身

좋은 이웃인 현학 가까이 가을 알리고/警秋玄鶴芳隣近

들에서 자는 검은 소 그림처럼 새롭네/眠野烏牛活畵新

정자 오기 전에 그 명성 이미 좋다보니/未到斯亭名己好

동남쪽 길손과 주인 서로 즐거워했다네/東南賓主喜相因

                                                  감역(監役) 유초(酉樵) 양경묵(梁敬默)

 

   
▲ 당악 윤관하의 작품

신선 정자에 말 매놓고 속세에 살지 않으니/仙亭繁馬不生塵

육신의 부림 받은 지1) 까마득한 40년이라/形役茫然四十春

푸른 물 층벽 그림자 거꾸로 드리워 있고/碧水倒涵層壁影

흰 구름 늙은 솔 미세하게 둘러싼 터라/白雲細繞老松身

도기 머금은 듯한 숲 집들 고요하고/林含道氣家家靜

가을빛 띠는 산 그 모습 싱그럽구나/山帶秋光面面新

오늘밤 같은 담화 이백 년 만에 처음으로/二百年來今夕話

그저 밝은 달이 머물지 않을까 걱정스럽네/祗愁明月駐無因

                                             임진중추(壬辰中秋) 당악(棠岳) 윤관하(尹觀夏)

 

침수정의 뒤편에는 1925년에 건립한 사우인 오산사(鰲山祠)가 있는데, 현재의 건물은 퇴락하여 2009년 다시 세워진 것이다. 여기에는 일송(一松) 洪治 연봉(連峰) 홍진(洪縝) 팔우 홍경고를 배향하고 있으며, 침수정시집과 오산사지 등의 유물도 함께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 정자는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모습을 지닌 전라도 지역의 전형적인 정자의 형태로, 팔작지붕 골기와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중재실을 가지고 있다. 현재 화순군 향토 문화유산 제36호로 지정되어 있다.

(주)시민의 소리와 (사)호남지방문헌연구소에서는 그 노력의 일환으로 화순군에서 대표하는 5대 누정인 물염정, 영벽정, 임대정, 송석정, 침수정에 걸린 모든 현판을 탈초 및 번역하여 현판완역선집 편찬과 홍보 영상물 제작에 힘쓰고 있다.

1)형역(形役) : 정신이 육신의 부림을 받는 것, 즉 외물(外物)로 인해 자유의지(自由意志)가 구속됨을 말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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