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나라에 왔다
다른 나라에 왔다
  • 문틈 시인/시민기자
  • 승인 2016.09.28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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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고향 어머님께 안부 전화를 했더니 “다른 나라에 온 것 같구나. 갑자기 시원해졌어야.”라고 하신다. 나는 다른 나라에 온 것 같다는 말씀에 완전 공감했다. 갑자기 가을 나라에 들어서니 과연 다른 나라에 온 듯하다.

근 한 달 동안 매일 30도가 넘는 불볕더위에 시달렸는데 갑자기 하루아침에 대기가 서늘한 공기로 바뀌었다. 그런데 관상대에 따르면 이런 갑작스런 날씨 변화도 이상 기온이란다. 바깥출입을 하려면 온도표시를 들여다보고 옷을 바꿔 입고 나간다. 날씨 변덕이 심하니 이런 때는 자칫 감기 걸리기 십상이다.

간밤에 새벽 두시쯤인가 깨었다. 마치 대포소리 같은 꽝, 꽝 하고 천지를 울리는 소리에 그만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참이나 계속된 귀가 찢어질 듯한 소리에 일어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벼락치는 소리다. 번개가 치고 연이어 터지는 큰 굉음에 잠결에선 정말 전쟁이라도 난 줄 알았다. 아마도 내가 평소 전쟁 공포증이 심한가 보다. 가을이 오는 요란한 소리에 전쟁을 떠올리다니.

벼락치는 소리는 바로 집 근처에서 나는 것 같았다. 유리창이 흔들리고 굉장했다. 어릴 적에 이런 날은 어머님께서 집안에 연기를 피웠었다. 벼락을 피하는 무슨 방법 같은 것이 아니었나싶다. 벼락치는 소리가 어찌나 심했던지 무서워서 벌벌 떨던 기억이 있다. 다음날 아침 학교길에서 보니 집 앞 벼논 한 가운데가 둥그렇게 커다란 태죽이 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천둥 벼락 고개를 넘어 지금 막 다른 나라인 가을로 들어섰다. 가을이 성큼 다가서자 길가에 핀 가녀린 코스모스 행렬들이 처연하게 보인다. 산에는 도토리이나 밤을 주우러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지리한 여름이 갔다는 것만으로 생명의 기운이 돌아오는 듯하다. 내년 여름은 더 더워질 것이라는 예보는 생각하기조차 싫다.

세상에는 계절의 변화가 없는 지역도 있다. 어딘가 일부 지역에는 상하의 나라, 상춘의 나라들이 있다. 그런 곳에는 벌들도 꿀을 모아들이지 않는다고 한다. 어느 때든 배가 고프면 나가서 꿀을 따러 나갈 수 있으니 굳이 쟁여놓을 필요가 없단다. 그렇다고 그런 곳이 낙원일지는 의문이다. 철따라 풍경이 바뀌는 사계절이 낙원의 모습이 아닐까.

무더운 여름에는 겨울을 그리워했는데 그 사이로 가을이 앞 산 봉우리 위로 짙푸른 하늘을 비단을 깔 듯 하면서 오고 있다.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 가을의 청명한 대기에는 사람을 우울하게 하는 요소가 있다든가 했다. 그래서 가을을 사색의 계절이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을은 사람을 감상적으로 만드는 무엇인가가 분명 있다.

추수의 계절에 풍성한 잔치 기분이어야 할 터인 데 어째서 그런 기분이 되는 것일까. 얕은 우울감과 만물의 생성소멸에 대한 깊은 고뇌가 스며드는 것은 내면의 성숙을 이끄는 자연의 이법이 아닌지 모르겠다.

무엇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는 가을을 나는 대환영한다. 지난 여름 태양에 볶여 지내다 보니 가을의 발자국 소리가 이렇게도 반가울 수가 없다. 먼 데 사는 오랜 친구가 찾아오는 듯하다. 가을에는 여름의 잔해를 떨쳐버리고 ‘다른 나라’를 직접 걸어볼 요량으로 이렇게 저렇게 궁리를 하고 있다.

광주서 서울까지 걸어가 보겠다는 원대한 목표다. 그것이 내 체력으로 과연 가능할지 벌써부터 자신감이 흔들린다. 차로, 기차로, 비행기로만 다니던 길을 두 발 바닥을 디디며 나라를 딛고 걸어서 가보고 싶다는 것. 나의 오랜 생각은 그럴싸한데 어찌 될지 모르겠다.

가을에는 무엇인가를 저질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가만있으면 안 될 것만 같은 솟아오르는 무엇이 마음자리에 있다. 해남 출신의 시인 박성룡은 가을을 황홀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모든 것이 멸렬(滅裂)하는 가을을 그려 그는 홀로/황홀한 빛깔과 무게의 은총을 지니게 되는//과목에 과물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과목’의 일부) 과일나무들도 가을을 기려 황홀을 터뜨리는 것일진대 인간인 내가 가만있을 수 있는가 말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감동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다.

다른 나라 가을로 이주해온 내가 먼저 할 일은 책을 정리하는 일이다. 읽은 책들은 추려내 어디로 보내고 나머지는 읽을 순서를 매겨 재정리하는 것이다. 당송 팔대가들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노래한 시문들을 천천히 다시 읽어볼 참이다. 연암 박지원의 웅숭 깊은 글들도 처음 읽는 것처럼 다시 들여다보고 싶다. 그러고보니 책들을 가려내는 일도 쉽지가 않을 듯싶다.

더위에 지쳐 책을 별로 읽지 못하고 지낸 여름이 불만스러웠는데 가을이 온 것은 내게 축복과도 같은 느낌이다. 나만 그런 황홀한 느낌이 드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잠자리들이 두 마리씩 한 몸으로 짝지어 공중을 신나게 날아다니는 모습이 그들대로 생의 절정을 구가하는 듯해서 보기 좋다. 가을이 가져온 ‘황홀’과 ‘경악’을 저런 미물도 알고 누리고 있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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