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 누정문화의 재조명(3)-송석정
화순 누정문화의 재조명(3)-송석정
  • 서성우 호남지방문헌연구소 연구원
  • 승인 2016.09.22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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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고 물러남의 이치를 실천한 양인용과 그 송석정
▲ 송석정

화순군 이양면 강성리 예성산 아래 지석천을 내려다 보이는 곳에는 송석정이라는 누정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 높지 않은 낮은 절벽에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고, 송림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져있어 절경을 이루고 있다.

이 누정은 제주인 양인용이 1613년(광해군 5)에 건립한 것으로, 그는 광해군 때 참정(僉正) 벼슬에 있다가 당쟁으로 정계가 혼란스럽고, 결정적으로는 인목대비의 폐위사건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이곳에서 한 생애를 보냈다.

참고로 그의 자는 여함(汝涵), 호는 송석정(松石亭)으로, 양팽손(梁彭孫)의 증손이며 호조 참판(戶曹參判) 양산립(梁山立)의 아들이다. 《능주읍지》(1965)에 그는 “학식이 풍부하고 지조가 뚜렷했다. 조선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첨정을 지내다가 광해군 때 고향인 화순에 내려와 송석정을 축조하고 그곳에서 시문을 지으며 여생을 보냈다. 덕행이 뛰어나 당세에 저명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증조부인 양팽손은 조선 중기 화순군 능주면 출신의 문신·학자로, 송흠(宋欽) 문하에서 수학했고, 송순(宋純)·나세찬(羅世贊) 등과 동문수학한 개혁파 조광조(趙光祖)가 유배되었을 때 곁에서 함께했으며, 조광조가 타계하자 그가 사신(捨身)을 수습하였으며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관직이 삭탈된 뒤 낙향하였다. 이후 고향에 학포당(學圃堂)을 짓고 은거하였는데, 이 학포당 또한 인근마을인 이양면 쌍봉리에 위치해 있으며,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관광지 중의 하나이다.

송석정이 건립된 이후에 몇 차례 수리가 이루어졌는데, 그의 후손인 구봉(九峯) 양위남(梁渭南), 양우전(梁禹甸)을 거쳐 양지해(梁之瀣)가 중건하였고, 이후 양찬호(梁贊浩), 양익환(梁益煥) 등이 1893년(고종 30) 에 중수를 하였다. 현재는 1982년 중수를 거쳐 지금까지 유지되어오고 있다.

▲ 송석정 편액

정내에는 현재 추사 김정희의 ‘송석정’편액과 조선 중기 학자이자 의병장이었던 안방준(安邦俊)의 시액, 그리고 광주 학생 운동의 주역인 송홍(宋鴻), 조희일. 안방준. 김창흡의 시문 등이 새겨진 현판 총 31개가 걸려있다. 아쉽게도 기우만의 《송석정기(松石亭記)》와 최익현이 지은 《송석정기(松石亭記)》, 수많은 차운시를 낳게 했던 양인용의 《원운(原韻)》시 등은 현재 그곳에서는 볼 수 없다.

먼저 송사 기우만이 남긴 《송석정기》의 일부를 소개해 본다.

“대개 송석이라고 하는 물건이란 먼 하늘 험한 계곡이 있는 곳이다. 베어서 기둥이나 들보로 만들고 고쳐서 주춧돌로 만드니 어찌 원하여 하고자 하는 것이 없으리오, 그 세상을 못 만난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 없고 차라리 내 뒤로 윤택케 할 뜻을 지키고 내 곧은 절개를 안보하면 호수와 산의 한 구역과 절승인 한 누정이 초연히 더렵혀지지 않아 즐거움이 이에 있으니 좋은 벼슬이라도 족히 얽매이지 못하리니 고위 고관이라도 어찌 일찍 타격에 이를 것을 꿈이나 꾸겠는가, 세손에 전하여 처사공(處士公) 우순(禹旬)이 이어서 살고 있으니 대개 그 누정을 누정으로 하고 그 송석을 송석으로 하니 이른 바 그 마음을 마음으로 하여 사람들이 지금도 말을 하니 이 누정이 세상에 이름난 것이 어찌 다만 산수가 절승한 따름이라고 하랴.”

-송사 기우만의《송석정기》중에-

송사 기우만은 그 후손인 익환과 규환과 함께 송석정에 올라 이를 바라보고 느낀 감흥을 이 같이 글로 남겼다. 면암 최익현도 당시 송석정의 주인인 첨정공의 10대손 익환의 부탁을 받고 《송석정기》를 남긴다.

“어느 날에 정자의 주인이 서신을 보내어 한말 얻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백세의 뒤로 하여금 우리 선조께서 후손들을 넉넉히 하려는 뜻이 별도로 있는 데에 있고 다만 강산이나 정사의 흔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다만 아마 먼 후손이라도 가히 입적되어 구원에서 뵈어도 유감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첨정공 같은 이는 그 세대를 상고해 본즉 벼슬하거나 사람을 택하는 것이 선조(宣祖)와 인조(仁祖)의 성한 때요 그 지벌인즉 바람이나 실상이 함께 융성한 유문고가(儒門故家)이니 진실로 진취코자 한다면 평소대로 걸어가도 현달하고 영화스러울 것은 차례대로 될 터 인데 유연히 벼슬을 버리고 한가하고 적막한 곳에 은거처를 정하고 편안하고 한가롭게 지내다가 그 나이를 마치니 세상에 보기 드문 높은 지조가 있지 않으면 능히 그렇게 했겠는가. …… 작은 정자가 수 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않고 무너지지 않아 의젓하게 높은 산 큰 내와 함께 오래간다는 것은 진실로 어진 자손이 뜻과 사업을 잘 잇지 않았거나 세속의 바쁜 경쟁에 떨어져 명성이나 이욕에 흔들리지 않았다면 가히 이와 같이 할 수 있었겠는가. 처음 창건하고 이루어 놓은 것을 지키는 두 가지 어려움을 겸해서 다한 이는 내가 양씨에게서 보았다. 그 같은 이름 있는 정자는 실계가 풍연에 이르니 우산(牛山, 안방준의 호), 삼연(三淵, 김창흡의 호) 선생 이하로 우열을 판정한 글이 거의 집안에 가득하니 기를 짓는 데는 별 일이 없다. 주인의 돈독한 행실과 고상한 의지는 능히 가문의 명성을 이을 것이니 곧 첨정공의 10대손인데 그 이름은 익환(益煥)이다.”                                 

-면암 최익현의 《송석정기》-

면암 최익현은 첨정공이 나아가고 물러나는 출처(出處)를 아는 현달한 사람임을 칭송하는 내용과 함께 선조의 뜻을 잘 잇고 바쁜 경쟁에 떨어져 명성이나 이욕에 흔들리지 않은 후손들도 더불어 칭송하고 있다. 물론 형식적인 인사말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대대로 내려져 올 수 있었던 것은 그 후손의 몫으로, 그것을 선조의 뜻에 따라 지켰던 후손들에 대해서는 마땅히 칭송되어져야 할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 송석정에는 많은 문인들의 차운시를 낳게 했던 양인용의 원운시가 있다. 당시 그가 벼슬을 그만두고 내려와 느낀 감회가 잘 드러나 있다.

사내가 때를 만나지 못해/ 男兒時不過

정도를 품고 숲속에 사노라/ 抱道臥林邱

궁함과 검약은 심경에서 오고/ 窮約心經入

공명이란 뜬 물거품이러라/ 功名水沫浮

소나무 어루만지며 월곡을 보고/ 撫松望月谷

수많은 돌 아래쪽에는 용두라/ 數石下龍頭

답답한 속내 누구에게나 말할까/ 深衷誰與說

많은 객들이 찾아와 머물렀으면/ 多少客來留

이 원운시를 보고 많은 문인들이 이곳을 찾아 많은 시를 남겼는데, 정방(鄭枋), 죽음(竹陰) 조희일(趙希逸), 은봉(隱峯) 안방준(安邦俊),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우재(愚齋) 홍우석(洪祐錫),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정운(靜雲) 심상덕(沈相德) 등의 많은 시가 편액되어 걸려있다. 그 중에 몇몇 작품을 감상해 본다.

     
 
   

▲ 오천 정방 <謹次>

자꾸자꾸 구름과 안개 해치니/故故披雲霧

앞길이 문득 상쾌해 지네/前程忽爽邱

앙상한 소나무 학 뼈 같고/松癯如鶴骨

오래된 돌은 자라 머리 같다/石老似鰲頭

우연히 푸른 병풍 대하고 섰다가/偶對蒼屛立

화려한 돛배 떴는가 의심 했지/却疑畵舫浮

그저 뒷날 가볼 것을 약속하니/聊將他日約

산과 강이 연이어 남아 있을테니/山水一聯留

정방, <謹次松石亭韻>

 

▲ 우산 안방준 <題松石亭>

그가 그윽히 거처한 땅은/梁子幽捿地

세속의 사람과 수레 없어/都無俗士車

흐르는 시냇물 가로놓인 거울이고/溪流橫素鏡

수려한 봉우리 점점 푸른 비단이라/峰秀點靑羅

괴이한 바위 한가함 가운데 벗이요/怪石閑中友

거문고 같은 솔은 검소함 속 사치라/琴松儉裏奢

내 장차 반 틈이나 나눌라 치면/吾將分一半

어딘들 오이 심기 마땅치 않겠는가/何處不宜苽

우산 안방준, <題松石亭>

 

▲ 연재 송병선 <謹次>

땅은 큰 사람 때문에 더 나으니/地以碩人勝

남주에서 제일가는 언덕이로세/南州擅一邱

고상한 인품은 형상밖에 넉넉하고/高風餘象外

높은 난간 흐르는 물을 베고 있지/危檻枕流頭

언덕 높으니 솔 그림자 옅고/岸高松陰瘦

연못은 빈 듯 달그림자 떠서/潭空月影浮

아스라이 나의 상념 일어나니/超超起我想

작은 배로 남기로 멋진 약속 했겠지/佳約蘭舟留

연재 송병선, <謹次>

 

송석정은 현재 화순군향토문화유산 제2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정방향에 가까운 팔작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에 중앙에 온돌로 된 재실이 있다. 또한 이 곳은 건축 구조상 이 지역 정자 건축의 규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소중히 보존해야 할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주)시민의소리와 (사)호남지방문헌연구소에서는 그 노력의 일환으로 화순군에서 대표하는 5대 누정인 물염정, 영벽정, 임대정, 송석정, 침수정에 걸린 모든 현판을 탈초 및 번역하여 현판완역선집 편찬과 홍보 영상물 제작에 힘쓰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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