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18)-제봉로
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18)-제봉로
  • 정선아 기자
  • 승인 2016.09.20 18: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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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인 고경명 장군을 기리기 위해 명명
옛 광주의 모습 회상할 수 있는 길
▲ 제봉 고경명

노장의 힘, 호남 의병장 제봉(霽峰) 고경명 (高敬命)

1533년 전라도 광주 압보촌에서 대사간 고맹령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장흥(長興)이고, 자 이순(而順), 호 제봉(霽峰) ·태헌(苔軒), 시호 충렬(忠烈)이다.

1552년 진사시와 생원시에 동시 입격하여 진사가 된다. 1558년 식년시 문과에 갑과 1위로 장원급제 하면서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공조좌랑, 형조좌랑, 사간원헌납, 사헌부지평, 등을 거치며 1563년에는 홍문관교리가 되었다.

인순왕후의 외숙인 이조판서 이량의 권세를 쥐고 흔드는 행위에 대해 논의할 때, 교리로서 참여하여 이량을 공격한다. 하지만 아버지 고맹영과 그의 장인 김백균이 이량의 수족인 관계로 울산 군수로 좌천되며, 그해 11월 사헌부가 그를 탄핵하여 파직된다.

1581년 동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복직한다. 훈구파의 자제라는 비방에도 율곡 이이가 그의 능력을 인정해 관직에 머물 수 있었다.

이어 조선 건국부터 선조 때까지 200여 년간 중국 명나라에 잘못 기록된 이성계의 세계(世系)를 고쳐 달라고 주청하려 주청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83년 한성부 서윤, 한산 군수를 거쳐 예조 정랑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84년 사복시 첨정이 된 뒤 성균관사예를 거쳐 1586년 순창 군수로 재직하였으나 1588년 파직되었다.

1590년 승문원판교로 다시 등용되고, 동래 부사로 지내다 당파 싸움으로 서인이 제거될 때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592년 고향으로 내려와 학문에 열중하며 지내던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피신했다는 소문을 듣고 60세의 노구의 나이로 호남의 의병을 모집하기로 한다.

왕이 피신했다는 소문에 의병 모집은 어려움을 겪지만 그는 두 아들을 내세워 한 달 만에 6,000여명의 의병을 모집한다.

의병들을 이끌고 북상하여 전라도로 침입하려 금산에 집결하고 있던 왜군과 싸우다 둘째 아들인 인후와 같이 전사하였다.

고경명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큰 아들인 종후가 의병을 이어 일으켰다. 능주에서는 최경회가 전라우의병을, 보성에서는 임계영을 중심으로 해 전라좌의병을, 남원에서는 변사정을 주축으로 적기의병군을 일으켰다. 모두 고경명 휘하의 의병들이었다.

사후 그의 공적을 기려 좌찬성에 추증됐다. 광주의 포충사(表忠祠), 순창(淳昌)의 화산서원(花山書院),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종용사(從容祠)에 배향되었다. 주요 문집에는 《제봉집(霽峰集)》, 저서에 《유서석록(遊瑞石錄)》 등이 있다.

그는 시와 그림, 글씨에 솜씨가 뛰어났으나, 그보다 그의 의병정신이 현세에 더 부각되어 알려져 있는 게 사실이다.

광주의 옛 모습이 생각나는 제봉로

▲ 남광주역 (제봉로 지하 1)

임진왜란시 의병장인 고경명장군을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으며, 지난 2009년 7월 27일 고시됐다. 제봉로의 첫 기점은 동구 학동에 위치한 지하철역인 남광주역(제봉로 지하 1)이었다.

남광주역을 지나가는 고가교 밑에부터 시작되는 제봉로는 차가 많이 다니고 사람도 많이 교우하는 길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남광주시장과 병무청, 전남대병원, 조선대병원 등이 밀집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위가 가고 오는 바람에 가로수 은행나무에서 익은 은행들이 도보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떨어진 은행을 피해 장날이 따로 없는 매일시장 남광주시장(제봉로 17번길)으로 들어갔다. 언제나 사람들이 붐벼 말 그대로 시장통을 이뤘다. 가까이 위치한 대인시장과 비교하면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주변에서 운영되는 병원 때문인 탓도 있으리라.

남광주시장 뒷편에는 철도 이설로 2000년도에 폐지된 남광주역의 철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를 활용하여 남광주시장은 오는 10월 ‘남광주 밤기차야시장’ 개장을 준비하고 있다.

▲ 길의 한 편을 차지하고 있는 전남대병원 건물들

시장 맞은편엔 전남대병원이 커다란 크기와 넓이로 제봉로의 한 부분을 독차지 하고 있다. 큰 병원의 영향인지 이 주변엔 약국과 개인병원, 의료기, 보청기, 죽 집 등의 상가들이 아시아문화전당 전까지의 일대를 둘러싸고 있었다.

9월 말에 열릴 충장로축제 홍보를 위한 노란 등들이 달린 길을 따라 아시아문화전당을 지나 붉은 벽돌 건물인 전남여자고등학교(제봉로 158번길 8) 방향으로 길을 꺾었다.

▲ 제봉로의 우측에 자리하고 있는 전남여자고등학교
▲ 버스터미널이 있었다는 광주은행(제봉로 225)

옛 도청 자리와 가까이 위치한 전남여고는 1927년 5월 25일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로 개교하여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가했다. 학교 옛 본관엔 여학도기념 역사관이 지난 2011년 5월 25일 제84주년 개교기념일에 맞춰 개관되었고, 이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현존하는 유일한 사적지로 알려 지고 있다.

중앙초등학교(제봉로 167)를 지나 한미쇼핑사거리에서 동부소방서 방향으로 직진했다. 대인시장 일대는 예전에 롯데백화점과 광주은행(제봉로 225)건물 자리에 위치한 공용버스터미널로 항상 사람들이 붐볐다고 한다. 지금은 사라지고 대형 백화점으로 인해 활발했던 주변 상가는 많이 잠잠해진 것으로 보인다.

▲ 광주역이었던 동부소방서(제봉로 210)

빨간 소방차가 일렬로 늘어서 있는 동부소방서(제봉로 210) 자리는 원래 광주역이 위치해 있었지만, 1969년 현재의 위치로 신축 이전하였다. 그 당시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은 지금도 광주역을 ‘신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섯 갈래로 나눠진 대인교차로에서 중흥육거리 방향으로 직진했다. 여기서부터는 낮은 건물들이 이어졌다. 대부분 주택으로 이루어져 있고, 아파트는 한 채 정도 보인다. 6차선의 큰 도로엔 양 옆으로 고철, 금속, 자동차 등 사람들의 이목을 주목시키긴 어려운 상점들이 광주역까지 나열되어 있었다. 길에 차는 많이 지나다녔지만, 인적은 드물어 대조를 이뤘다.

남광주역부터 아시아문화전당 둘레를 돌아 광주역까지 약 3000m의 짧은 길이지만 옛 광주의 모습을 회상시켜볼 수 있는 제봉로는 광주역 앞을 지나는 무등로와 만나며 끝이 났다.

제봉로도 제봉 고경명 의병장을 기리는 알림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제봉로에 대해 주민 사람 몇몇에게 물었으나 아는 사람은 찾기 어려웠다. 광주시는 주민들에게 정보 나눔을 시급히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포충사(褒忠祠)

▲ 포충사(褒忠祠) ⓒ문화재청

고경명 의병장에 비해 ‘포충사’는 사람들이 많이 들어봤다고 한다. 남구 원상동에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의병장 고경명과 그의 두 아들인 종후, 인후 그리고 유팽로, 안영 등 5명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사원이다. 고경명의 친필로 쓰여진 마상격문(馬上激文)과 목판 493장 등이 보존되어 있다.

포충사 앞에는 고경명의 충실한 노비로 주인과 함께 전쟁에 참여했던 봉이(鳳伊)와 귀인(貴仁)의 비문이 자연석에 새겨져 있다. 고경명이 전사했을 때 그의 시신을 거두어 정성껏 장사를 지냈고 그의 첫째아들 고종후를 따라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인물들이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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