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17)-건재로
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17)-건재로
  • 박용구 기자
  • 승인 2016.09.07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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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호남 최초 의병장 김천일 장군의 호를 따서 명명
나주 산정삼거리에서 광주 광산구 본덕IC까지 8100m

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기 위해 나주로 향했다. 이번 열일곱 번째 순서는 건재로다.

건재로는 나주 산정삼거리에서 시작해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덕IC에서 끝나는 총 길이 8100m의 4차로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나주 동신대에서 나주 노안까지의 길이다. 건재로의 약 90%는 나주에 있고, 광주에는 약 10% 정도 걸쳐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건재로의 시작점인 나주 산정삼거리

건재로로 명명한 이유에 대해 나주시 관계자는 “김천일 장군의 호를 반영해서 지어진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건재로는 2009년 7월 10일 고시됐고, 1번지부터 808번지까지 있다”고 설명했다.

이와 같이 건재로로 명명한 배경을 설명하는 알림판이 건재로 내에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없다”고 짧게 답했다.

역사적 인물을 기리기 위해 도로명을 지었다면 그에 걸맞은 설명문 정도는 해당 도로에 설치되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밀려온다.

나주 산정삼거리는 나주 구도심에서 목포 또는 영암으로 가는 길과 광주 동곡에서 나주 노안, 동신대를 거쳐 목포 또는 영암으로 가는 길이 만나는 삼거리다.

산정삼거리에 도착해 보니 건재로가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로 향하는지를 바로 알 수 있었다. 도로명 표지판이 건재로의 시작점과 어디로 향하는지를 잘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렬사를 소개하는 커다란 안내판

이곳 삼거리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은 정렬사를 소개하는 커다란 안내판이었다. 거기에는 ‘임진왜란 호남 최초 의병장 김천일, 정렬사’라고 적혀 있다. 왜 이 도로가 건재로로 명명되었는지 납득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 나주 동신대 쪽을 바라보니 좌측으로 금성중․고등학교와 나주공고가, 우측으로는 새로 지어진 아파트 단지들이 눈에 들어온다.

금성중․고, 나주공고, 동신대 등 건재로에

금성중․고등학교의 도로명 주소는 건재로 41번지다. 금성중학교는 1968년 3월 1일 버드실중학교로 개교했다가 1979년 3월 1일 지금의 교명으로 변경했다. 금성고등학교는 1988년 3월 5일 개교했다.

나주공고의 도로명 주소는 건재로 43번지다. 나주공고는 1972년 12월 20일 나주 한독공업고등학교로 설립됐다가 1982년 3월 1일 금성종합고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고, 1988년 3월 1일 나주공업고등학교로 다시 교명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주공고 건너편에서부터 전라남도 싸이클경기장까지 사이에는 현대, 호반, 대방 등의 아파트들과 상가들이 자리잡고 있다.

전라남도 싸이클경기장의 도로명 주소는 건재로 130-13번지다. 올 4월 제33회 대통령기 전국사이클 대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여기까지 보고 난 후, 건재로가 김천일 장군의 호를 따서 명명된 도로니, 그를 모신 정렬사를 먼저 들러보기로 했다. 정렬사로 가기 위해 동신대 정문에서 유턴을 했다. 올 때 들르지 못했던 것이 후회스럽다.

정렬사는 산정삼거리에서 1Km 남짓에, 아파트 단지 건너 입구에서는 400m 안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정렬사로 가는 왼편에는 동신대가 있어서인지 원룸들이 여러 채 있었고, 오른편은 동신대 캠퍼스였다.

정렬사는 김천일 장군 등 나주의 충절인물 5분을 모신 사우

정렬사는 임진왜란 때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김천일(金千鎰, 1537∼1593) 장군과 그의 아들 상건(象乾), 양산숙(梁山璹), 임회(林檜), 이용재(李容濟)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사우다.

▲정렬사 입구

정렬사가 최초로 건립된 것은 선조 39년(1606년)으로 현 나주고교 뒷편 월정봉 아래에 있었다가, 이듬해인 1607년 정렬사로 사액되면서 현 나주잠사공장 부근으로 옮겨졌다. 이후에도 여러 번 자리를 옮기고 보수를 거치면서 1984년 현재의 나주시 정렬사길 43번지에 자리잡게 되었다.

사당 경내에는 김천일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렬사비(전남기념물 48호), 유허비, 건재동상, 유물관 등이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반의 규모로서 팔작지붕이고, 내삼문과 외삼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 평대문이다. 정열사비는 인조 4년(1626년)에 건립되었으며, 비문은 장유 선생이 지었고,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활동과 국내 전투상황이 자세히 적혀있다.

정렬사 홍보지에 따르면 김천일 장군의 본관은 언양,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극념당(克念堂). 아버지는 진사 언침(彦琛)이다.

호남 최초로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1592년 임진왜란 때 서울이 일본군에게 함락되고 국왕이 피난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경명·박광옥·최경회(崔慶會) 등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촉구하는 글을 보냈다. 이어 호남에서 가장 이른 5월 6일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6월 3일 서울 수복을 목표로 북으로 향했다.

8월에 전라병사 최원(崔遠)의 관군과 함께 강화도로 거점을 옮기고, 강화부사·전라병사와 협력하여 연안에 방책을 쌓고 병선을 수리하는 등 전투를 준비했다. 이 무렵 장례원판결사의 벼슬과 창의사(倡義使)라는 군호(軍號)를 받았다. 그 뒤 조정과 호남·호서를 연결하는 전략상 요지인 강화도를 중심으로 양화도전투, 선유봉(仙遊峰) 및 사현(沙峴)전투, 행주산성전투 등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1593년 명과 일본 간에 강화가 제기되었을 때 이를 반대했다. 그해 6월 2차 진주싸움에서 관군·의병의 지휘관인 도절제(都節制)가 되었다.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 충청병사 황진(黃進) 등과 함께 항전했으나, 10만에 달하는 적군의 공세로 성이 함락되자 아들 상건(象乾)과 함께 남강에 투신 자결했다.

▲건재 김천일 장군 초상화

1603년(선조 36) 좌찬성에 추증되고, 1618년(광해군 10) 영의정이 더해졌다. 진주 창렬사(彰烈祠), 순창 화산서원(花山書院), 태인 남고서원(南皐書院), 임실 학정서원(鶴亭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건재유집〉이 있고, 시호는 문열이다.

정렬사를 둘러보고 나서는 동신대 캠퍼스를 가로질러 정문을 통해 건재로로 나왔다.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 동신대 정문 오른편 길은 나주IC와 영광으로 향하는 도로다.

동신대학교는 전라남도 나주시에 있는 사립종합대학교로 1987년 3월 11일 동신공과대학으로 개교했다. 1990년 12월 동신대학으로 교명을 바꾸었고, 1992년 3월 종합대학교로 승격되었다. 동신대학교의 도로명 주소는 건재로 185번지다.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 독립운동가 하산 김철 선생 묘

동신대 정문에서 300여m 가량 노안 쪽으로 직진하니 작은 안내판 하나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독립운동가 하산 김철 선생 묘소’라고 적혀 있다. 의병장이었던 김천일을 기리는 건재로에서 독립운동가 김철의 묘소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하산 김철(金哲) 선생의 묘는 건재로에서 나주북초등학교 쪽으로 200여m 올라가 왼편에 위치해 있었다.

김철은 나주출신으로 광주에서 3.1운동 주도한 1세대 독립운동가다. 김철의 본명은 복현이요. 호는 하산(何山)이다. 청년시절 교회 활동을 통해 항일운동을 모색하던 그는 광주YMCA 초대 총무로 초대 이사장인 오방 최흥종 목사와 같이 광주·전남지역의 3·1운동 책임자로 추대되어 3.1운동을 주도했다.

해방 후 그는 전남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추대 됐으며, 건준이 해체된 후에는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아 활동했다. 1946년에는 신민당의 전남지부 위원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조선인민당에서도 활동했다.

▲올 3월 1일에 열린 독립운동가 김철 선생 추모제 모습

4.19혁명 이후 사회대중당 전남도당을 결성, 활동을 제기한 이후 사회대중당에서 분리된 사회당 고문을 맡아 민주주의 완성과 조국통일을 위한 마지막 투쟁을 전개했다. 민주주의와 통일의 비원을 가슴에 묻은 채 1969년 6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매년 3월 1일 이곳에서 그를 추모하는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다시 건재로는 청동길, 석정길과 만나고 헤어지면서 석현교를 넘는다. 석현교를 조금 지나니 왼편에 노안농공단지가 눈에 들어온다. 노안농공단지에는 현재 식음료, 금속, 전기관련 20여개 업체가 가동 중이다.

배를 비롯해 나주의 농특산품을 파는 가게들도 여럿

이어 건재로는 나주가 배로 유명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좌우로 배밭을 거느리고 달린다. 또 이 구간에는 갓 수확한 배를 비롯해 나주의 농특산품을 파는 가게들도 여러 개가 있었다.

나주는 예로부터 많은 농가가 배를 재배했고, 나주배는 1430년 세종실록지리지 나주목편에 토공물로 기록될 정도로 품질이 우수했다.

▲나주시농특산물판매장

쌈지공원에 이르니 나주시농특산물판매장이 나온다. 나주시농특산물판매장의 도로명 주소는 건재로 596번지다. 판매장 내부를 들여다보니 텅 비어 있다. 팔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운영이 안 되고 있는 이유가 궁금해 나주시 관계자에 물으니 계약이 만료되어 새로운 위탁운영자를 이달 말까지 모집 중이라고 답했다.

▲승천보선착장을 안내하는 입간판

판매장을 조금 지나니 나주 쪽 건재로가 끝이 나고, 광주 쪽 건재로가 시작된다. 바로 그 언저리에 승천보선착장을 안내하는 입간판이 서있다. 승천보선착장에서는 영산강을 운항하는 황포돛배를 탈 수 있다.

나주 산정삼거리에서 출발해 8100m를 달려온 건재로는 광산구 본덕IC에서 끝이 난다. 혁신도시나 영암 방면으로 빨리 가려면 이곳에서 우회전을 하면 된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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