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서 만난 호치민(9)
베트남에서 만난 호치민(9)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6.09.05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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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968년 1월말의 테트(음력설) 공세는 베트남 전쟁의 분수령이었다.

사이공의 미국대사관에 잠시나마 성조기가 내려지고 민족해방전선의 삼색기가 펄럭이자 미국인들은 경악했다.

베트남 전쟁을 ‘텔레비전 전쟁’이라고 불렀듯이 미국인들은 안락의자에 앉아 이 장면을 보았다. 이 순간 ‘미국이 이기고 있다’고 줄곧 홍보한 존슨 정부는 거짓말쟁이가 되었다. 점차 베트남전쟁은 선이 악과 싸우는 ‘우리들의 전쟁’이 아니라 ‘발을 빼기 위한 전쟁’으로 인식하는 미국인들이 늘어났다. 주1)

그런데 3월16일에 미 라이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베트남의 킬링필드’라 불리는 사건은 군사작전을 벌이던 미군이 이 마을에서 강간과 약탈을 자행한 뒤 504명의 비무장 민간인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이 사건은 사실상 테트 공세에 대한 보복이었다.

불행하게도 6월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되었다. 그는 대표적인 반전주의자였다. 8월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반전주의자들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후 미국사회는 반전 여론이 고조되었고 평화행진, 시위, 그리고 시민불복종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호치민은 반전 영웅으로 떠올랐고 호치민은 보다 유리한 전쟁을 할 수 있었다.

1969년에 공화당 닉슨 행정부가 출범하였다. 1월에 닉슨은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베트남 화’를 선언하였다. 미국은 군사원조, 재정지원을 하고 전쟁은 남베트남 정부와 국민이 수행하는 전략이었다. 미국은 7만 명의 남베트남 장교를 훈련시키고 20억불의 군사원조를 제공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런데 티우 정부는 미국의 군사지원 경제원조에도 불구하고 부패와 방탕 그리고 국민 탄압으로 남베트남 국민 간에 반미감정이 확산되었다.

6월 들어 닉슨 대통령은 남베트남에서 일차로 2만5천명의 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발표했다. 명예로운 후퇴를 모색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2중적 행태를 보였다. 한편으로는 베트남 전쟁의 베트남화를 추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베트남에 대한 공격을 더 강화하고 전선을 캄보디아를 비롯한 인근지역까지 넓혀갔다.

미국은 B-52 폭격기와 전폭기를 동원하여 대규모 공습을 하였다. 심지어 고엽제를 살포하였고, 베트남 사람을 마구 죽이고 마을을 파괴하는 ‘씨 말리기 작전’을 폈다. 주2)

실제로 미국의 베트남 폭격 포탄 양을 보면 1967년에 868000톤에서 1968년은 1,259,000톤 1969년은 960,600톤 이었다. 한편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은 67년 27만 톤에서 68년 20만 톤, 69년 3,600톤으로 69년에는 현저하게 줄었다. 그러나 남베트남에 대한 폭격은 67년 598천 톤에서 68년 1,059천 톤, 69년 957천 톤으로 68년 이후 현저히 증가되었다.

▲ 호치민시 전쟁박물관에 전시된 표

그런데 남베트남에서 미군의 싸움은 딜레마였다. ‘미군부대가 평야지대에서 게릴라를 뒤쫓고 있을 때 NFL주력군(소위 베트콩)은 평야지대가 내려다보이는 산악의 요충지에 진지를 확보한다.

미군과 베트콩이 진지를 확보하고자 쟁탈전을 벌이는 사이에 평야지대에서는 게릴라가 강화된다.

이에 미군은 모처럼 차지한 진지를 포기하고 다시 평야지대로 돌아간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는 동안 미군 사상자는 늘어만 간다.’ (후루타 모토오 지음 · 박홍영 옮김, 역사속의 베트남 전쟁, p138-139)

자신감을 얻은 민족해방전선은 1969년 6월6일에 남베트남 공화국 임시혁명정부를 세웠다.

마침내 7월20일에 79세의 호치민(1890-1969)은 연설에서 국민에게 늘 얘기하던 ‘미국은 질 것이다.’라는 표현에서 ‘미국은 지고 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미제국주의자들의 패배는 이미 확실합니다. ... 미 제국주의 침략세력은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베트남 인민은 반드시 완승합니다!”

 

주1) 1968년 테트 공세이후 미국 텔레비전이 보도한 전투 양상은 미국의 승리를 예상하는 보도는 44%로 감소하고, 호치민의 승리를 예상하는 보도가 32%, 미국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음에 대한 보도는 24%로 각각 상승했다.

 

주2) 고엽제로 울창한 밀림은 황폐화 되었고, 그 후유증은 2,3세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지독했다. 그래서 청교도의 나라 미국이 저지른 베트남 전쟁은 환경파괴, 생물파괴라는 규탄을 면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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