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 누정문화의 재조명(1)-물염정
화순 누정문화의 재조명(1)-물염정
  • 서성우 호남지방문헌연구소 연구원
  • 승인 2016.09.01 13: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민의 소리>는 2016년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창의주도형 지원사업의 하나로 전남 화순군의 누정문화를 새롭게 알아보는 자리를 마련한다. 누정문화가 단순히 옛 선조의 장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에 되살려 우리의 신문화로 정립할 수 있는 창의적인 접근을 시도할 것이다. 이번 기획에는 전남대 호남지방문헌연구소가 함께 한다. /편집자 주

① 물염정

속세의 더러움에 물들지 아니하리라

화순군 이서면 창량리의 동복천 상류에 여유로움을 만끽하기 좋은 한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이 정자는 1566년에 조선 중종·명종 때 성균관 전적, 구례 및 풍기 군수 등을 역임한 송정순(宋庭筍,1521~1584)이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던 중에 이곳에 띠집을 지은 것이 그 시초이다. 그는 자신의 호인 '물염(勿染)'을 따서 물염정이라고 하였는데, 외손인 나무송(羅茂松)과 나무춘(羅茂春) 형제가 물려받고 수차례의 중수를 거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물염정의 모습. 오른쪽 기둥 중 하나는 보수할 당시 울퉁불퉁한 배롱나무를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고 하는데, 많은 관광객의 관심을 받고 있다.

송정순의 본관은 지금의 충남 홍성지역인 홍주(洪州)이며 출신지는 담양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송기손(宋麒孫)이고, 아버지는 송구(宋駒)이며, 어머니는 안축(安軸)의 딸이다. 그는 유희춘(柳希春)과 함께 경사를 강론하였으며, 그의 문인으로는 송징(宋徵, 1564~1643)이 있는데, 그는 정철과 교유하였다. 한 번은 정철이 파면되었을 때, 신구소(伸救疏)를 올렸다가 연좌되어 10년 정거령(停擧令)을 받기도 하였으며, 또 한 번은 고용후(高用厚)가 무고를 당하여 투옥되었을 때 신무소(伸誣疏)를 올려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 류성운의 <勿染亭記>

(중략)이 정자는 이미 나라의 남쪽에서 유명해져 올라 바라본 자가 하나둘이 아니다. 만약 술 마시고 가무(歌舞)하면 성색(聲色)에 물들인 자요, 방탕한 놀이에 이끌리면 유람(遊覽)에 물들인 자다. 주전(廚傳)에서 사치하고 교만을 자행하여 산수에 어떤 즐거움이 있는지 알지 못하면 방백(方伯)은 공과 명예에 물들인 자요, 종들이 많고 의복과 장식을 잘 차려입으며 분주하게 보고 지나가면 수령이 전성(專城)에 물들인 자이다. 이에 마땅히 맑은 물결은 단련한 쇠와 같고 비 개인 달은 빛이 흘러 사방을 돌아봐도 고요하고 적은티끌도 이르지 않으면 정자는 물들지 않은 것이다. 사람은 이때에 마음이 담박하고 온갖 생각이 공허하여 마치 옛 연못과 같이 맑고 밝은 거울처럼 가림이 없어 저 네 가지의 물들임을 보고 하나도 물들임이 없다면 이는 물염(勿染)이라 이를 수 있다.(중략)  -류성운의 <물염정기> 중에-

류성운이 지은 <물염정기>의 일부이며, 현재 정자에 편액되어 걸려 있다. 이 글은 류성운이 물염정을 방문했을 때, 당시의 주인인 나무송(羅茂松)에게 “물염을 우리들이 유추할 수 있는가?”라고 하는 물음에 그가 답한 내용의 일부이다. 부연설명을 하자면 성색은 ‘여색(女色)’을 말하며, 방탕한 놀이는 ‘유련황망(流連荒亡)’에서 나온 말로, 배를 띄워 놓고 한없이 즐기는 것을 말한다. 또 주전은 음식점과 역전을 각각 말하는데, 여기에서는 지방을 오가는 관원에게 경유하는 역참에서 음식과 역마를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의 과유불급(過猶不及)을 연상케 한다.

화순의 적벽군 중의 하나, 물염적벽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는 물염정에서 시선을 옆으로 돌리면 동복천과 어우러진 일명 ‘물염적벽’을 볼 수 있다. 물염정 앞에는 조선 후기 방랑시인인 김삿갓의 동상과 시비가 세워져 있는데, 그는 물염적벽에 매료되어 이곳을 자주 찾아 시를 읊었던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 최근 물염적벽의 모습을 광주 상수도 사업소의 협조로 촬영한 사진이다. 유난히도 힘들게 했던 지난여름의 가뭄과 폭염으로 인해 물이 고갈되어 있는 상태이다.

참고로 화순적벽은 화순군 이서, 창랑, 보산, 장항리 일대, 동복댐 상류에서 약 7km구간에 형성된 절벽 경관을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물염적벽, 창랑적벽, 보산적벽, 장항적벽(일명 노루목적벽)이다. 이중에 물염적벽과 창랑적벽은 도로변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으나, 보산적벽과 노루목적벽은 광주시민의 식수원으로 사용하고자 동복댐이 건설되면서 상하수도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통제되었었다. 그러나 2014년 10월 23일 다시 부분적으로 개방되어 관광객들이 그 곳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적벽이라는 이름은 1519년 기묘사화로 인해 동복으로 유배왔던 신재 최산두에 의해 붙여진 것으로, 이곳의 절경을 보고 중국의 적벽보다 아름답다고 하여 그렇게 칭하였다고 한다.

1574년 무등산을 돌아보고 <유서석록(遊瑞石錄)>이라는 기행문에서도 제봉 고경명과 석천 임억령은 적벽을 신선이 사는 곳이라 하여 ‘적벽동천(赤壁洞天)’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또한 하서 김인후도 적벽을 노래하였으며, 특히 1777년 화순 현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온 다산 정약용도 물염적벽과 인연이 있는데, 이러한 내용은 그의 <유물염정기(遊勿染亭記)>라는 기행문에 잘 나타나 있다. 무엇보다 이 글에는 당시의 물염정과 물염적벽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어 의미가 있다.

오랜 역사를 머금고 있는 시인묵객들의 사색의 흔적

물염정에는 지나온 역사를 자랑하 듯 창주 나무송의 시문을 비롯하여 농암 김창협, 삼연 김창흡, 단암 민진원, 사애 민주현, 연재 송병선, 매천 황현 등의 시문이 새겨진 현판 총 29개가 걸려있다. 물염정을 소개하는 경내의 안내판에는 권필, 하서 김인후의 현판 등도 걸려 있다고 소개되고는 있으나 아쉽게도 지금은 걸려 있지 않다.

현재 걸려있는 많은 현판에 새겨진 작품 중에 몇 작품을 소개해 본다. 먼저 송정순에게 물염정을 물려받은 외손인 나무송이 지은 물염정 <원운(原韻)>이다.

두어 칸 초가집 동쪽 언덕에 지으니/數間茅屋結東皐

마을 모습은 의연히 사도마을 같고/門巷依然似謝陶

밤새 내린 강가 비에 고깃배 젖었는데/江雨夜來漁艇濕

골 구름은 아침에 걷혀 옥빛 봉우리 높네/洞雲朝散玉峯高

동자는 낙엽 모아 붉은 밤을 익히고/童收落葉燒紅栗

아낙은 국화 따다 흰 술에 띄우는구나/妻摘黃花泛白醪

숲속의 이러한 즐거움 빨리 알았었더라면/林下早知如此樂

어이 일찍이 청포의 신세로 고생했겠는가/靑袍身世豈曾勞

▲ 창주 나무송의 <原韻>

이 시를 보고 있으니 도잠(陶潛)이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돌아가자, 교제 같은 건 그만 쉬고 교유도 끊어 버려야지. 세상이 나와 서로 맞지 않는데, 다시 수레 타고서 무엇을 구하겠는가.……동쪽 언덕 올라가서 휘파람이나 불고, 맑은 물가 굽어보며 시나 노래해야지. 자연의 변화 따라 죽을 때 가면 그 뿐, 주어진 천명 즐기면 되지 또 무엇을 의심하랴”라는 시가 떠오른다. 도연명과 비록 시대를 달리하지만, 동쪽 언덕 초가집에 있으니 마치 도연명과 무엇이 달랐으랴.

위의 나무송의 작품에 훗날 매천 황현은 <삼가 물염정 시를 차운하다[敬次勿染亭韻]>라는 시를 남겼는데, 당시 그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기고와 함께 옥촉 이루긴 이미 틀렸거니와/巳違玉燭與夔皐

금단을 이루어 갈도를 찾기도 때가 늦었네/又晩金丹訪葛陶

지는 해에 먼 길 잊고 강을 따라 가노라니/落日江汀忘路遠

푸른 강가의 정자가 구름 위에 우뚝 솟았네/滄洲亭子拂雲高

백빈 뜬 물결 차고 달밤 젓대 소리 들려라/白蘋波冷月中笛

단풍 든 깊은 산촌엔 가을 탁주가 그만일세/黃葉村深秋後醪

서글퍼라 눈 위의 기러기 발자국 찾기 어려워/怊悵雪鴻難記跡

애써 수염 수없이 배배 꼬면서 읊조리노라/鬚根撚倒百回勞

▲ 매천 황현의 <敬次勿染亭韻>

끝으로 농암 김창협의 작품을 소개한다. 그는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의 둘째아들로, 여기에는 동생인 삼연 김창흡의 작품도 함께 있는데, 그들은 모두 문학과 유학의 대가로써 명성이 있는 한 집안의 형제이다. 아래의 작품은 그들의 아버지인 김수항이 진도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시기에 이곳에 들러 지은 작품으로 전한다.

사방 높은 언덕이 앞 다투어 우뚝한데/高崖四面競崔嵬

강 이어진 푸른 숲 그 빛 거꾸로 흐른다/積翠連江光倒廻

이미 깊고 깊어 좁은 길일 줄 생각했지만/己謂幽深窮峽路

어찌 궁벽한 곳에 다시 정자 있을 줄 알았으리/豈知僻處復亭臺

노니는 물고기 저렇듯 찬 연못에 뛰어오르고/游魚自在寒潭躍

늙은 국화는 치우치게 높은 난간에 피었구나/老菊偏當危檻開

이 흥치 다하여도 먼 흥은 가시지 아니하니/遐興未隨斯興盡

울부짖는 말 대숲에 매어두고 노닌다네/竹林嘶馬係徘回

▲ 농암 김창협의 시

이처럼 물염정은 물염적벽과 함께 아름다움 풍광은 물론 호남을 대표하는 문인들의 시문과 함께 어우러져 현재 전라남도 화순군 향토문화유산 3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광주 광역시 관광협회와 <무등일보>가 공동으로 광주 전남 8대 정자 선정 위원회에서 담양의 식영정, 완도의 세연정, 광주의 호가정, 곡성의 함허정, 나주의 영모정, 영암의 회사정, 장흥 부춘정 등을 선정한 바 있는데, 여기에서 화순의 물염정이 8대 정자 중에 제1호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의미를 깊이 새겨 더 이상 훼손되지 않게 보존하는 노력에 힘써야 할 것이다.

(주)시민의소리와 (사)호남지방문헌연구소에서는 그 노력의 일환으로 화순군에서 대표하는 5대 누정인 물염정, 영벽정, 임대정, 송석정, 침수정에 걸린 모든 현판을 탈초 및 번역하여 현판완역선집 편찬과 홍보 영상물 제작에 힘쓰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