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서 만난 호치민(6)
베트남에서 만난 호치민(6)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6.08.08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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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955년에 ‘베트남 공화국(소위 월남)’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응오 딘 지엠(1901-1963)은 초기에는 잘 하는 것 같았다.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배경으로 국가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고 적어도 호치민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호감을 얻었다.

그런데 지엠은 ‘신앙의 형제’와 ‘핏줄의 형제’를 너무 편애하여 남베트남의 분열을 초래했다.

젊은 시절 한때 신부(神父)가 되려고 했던 지엠은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주1)  그는 북베트남이 싫어서 내려온 카톨릭 신자 85만 명에게 정부와 군대의 요직은 물론 사이공과 메콩 강 지역의 토지를 주었다. 게다가 지엠 정권은 토지개혁으로 동요하고 있는 지주제를 부활시켜 소작인의 토지를 빼앗았다.주2)

더구나 지엠은 종교차별까지 서슴치 않았다. 농민들이 신봉하고 있는 불교와 신흥종교 까오 다이교와 호아 하오교 등을 탄압하고 카톨릭을 우대했다. 이런 종교차별은 반정부시위로 비화되었다.

한편 지엠의 ‘핏줄에 대한 사랑’은 더 노골적이었다. 동생 응오 딘 뉴는 경찰력을 장악했고, 동생의 부인 마담 뉴는 퍼스트레이디 행세를 하며 가톨릭 가치관에 따라 간음, 간통과 관련된 법률 제정에 앞장섰으며, 형 응오 딘 껀은 중부 베트남 대주교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지엠 가족들의 오만과 전횡은 ‘반공’이라는 명분하에 합리화 되었다. (최병욱 지음, 최병욱 교수와 함께 읽는 베트남 근현대사, 창비, 2008, p 140-150)

공산주의를 극도로 혐오하였던 지엠은 지주층과 기독교 세력, 해외 유학파, 군부, 경찰 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강력한 반공주의 정치를 폈다. 또한 학문 · 예술에 대한 검열을 강화하여 반체제, 반정부적인 서적이나 예술 작품에 대한 검열과 탄압정책을 폈다.

특히 지엠 정권은 공산주의자 고발 운동을 전개하여 반체제인사 수 천 명을 체포했다. 1959년에는 10/59 법을 만들었는데 이 법은 거의 모든 사람을 재판 없이 사형시킬 수 있었다.

이러자 남베트남의 공산당은 존립에 큰 위협을 받았다. 제네바 협정이후 남부에는 약 5-6만 명이 남아 있었지만, 1959년에는 불과 5천 명 정도만이 남았다.

남베트남 상황이 악화되자 호치민은 1959년 1월과 5월 두 번에 걸쳐 개최된 제15회 중앙위원회에서 무장투쟁 발동을 승인했다. 다만 남부의 해방문제는 기본적으로 남부 인민의 문제이며, 북부의 지원은 전투부대 파견이 아닌 제한적임을 천명했다.

이렇게 호치민의 결정은 온건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른 풀에 불을 붙였다. 1960년 1월 메콩델타 지역의 밴째성에서 일어난 봉기를 비롯하여 각지에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지엠 정권의 농촌 지배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1960년 12월 20일에 소수민족, 종교단체, 정치그룹들이 지엠 정부 전복, 외국 개입 종식 등을 주장하며 사이공 근교 빈호아 성 고무 밭에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National Front for the Liberation of Vietnam/NLF)'을 결성하고 무력투쟁에 나섰다.주3)

NFL의 주도 세력은 사이공과 메콩 강 지역 출신들로서 이들을 당시 남베트남 정부의 주류인 중부지역 출신들에 대항하였고, 1961년 2월에는 인민해방군을 창설하였다. 바야흐로 남베트남 내전이 시작된 것이다.

▲ 호치민이 1959년부터 살았던 거처, 냐 산

 

주1) 호치민은 베트남과 결혼한 주석이고 응오 딘 지엠은 하나님과 결혼한 대통령이었다. (최병욱, 최병욱 교수와 함께 읽는 베트남 근현대사, 창비, 2008, p 140)

 

주2) 1956년 중반부터 시작된 토지의 재분배 계획은 고질적인 족벌체제와 관리들의 심각한 부패로 실패하고 말았다 (마이클 매클리어 지음 · 유경찬 옮김, 베트남 :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3, p 112)

 

주3) 남베트남에서는 이들을 ‘베트남 공산주의자’라는 의미로 ‘베트콩(Việt Cộng 비엣꽁/ 越共)’이라 불렀다. 이 말은 지엠이 ‘NFL이 아무리 민족을 내세웠어도 본질은 공산당’이라면서 얕잡고 빈정대는 의미로 만들었는데, 나중에 미국인들이 그대로 따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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