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기록문화유산 (28) 장흥지방지
호남기록문화유산 (28) 장흥지방지
  • 문희숙 호남지방문헌연구소 연구원
  • 승인 2016.08.04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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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림고을' 장흥사람들의 역사를 담고 있는 장흥지역 소개

호남의 기록문화유산 중 지방지는 지역에 대한 정보를 가장 세밀하게 담고 있는 것으로, 지방지에 대한 관심이 지역을 이해하는 지름길이라 할 수 있다. 호남지방문헌연구소에서는 지방지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인식하여 지방지 관련 전시회를 개최하였고, 호남기록문화유산 홈페이지에 호남지방지 기초DB를 구축하고 있으며, 1,200여 종의 호남지방 지방지에 대한 기초정보와 간명해제를 담은 책 ‘호남지방지 기초목록’(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 동안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호남지방문헌연구소에서는 4주에 걸쳐 호남의 지방지를 소개하는 글을 기고하고자 하였으나 아직도 소개되지 않은 지방지 연구 성과물들이 많아 본 연구소에서 호남의 지방지 소개에 대한 기고를 연장하기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이번 호에는 ‘문림 고을’이라 할 만큼 학자와 문장가, 예술인을 다수 배출하고 부조리한 삶의 현실에 저항하고 행동했던 장흥사람들의 역사를 담고 있는 장흥지방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장흥(長興)이란 지명은 고려 인종이 이 곳 출신 공예태후를 맞아 의종·명종·신종을 낳은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내려줬다고 한다. ‘장흥(長興)’엔 ‘길이 번창하라’는 임금의 바람이 담겨 있는 것이다.

장흥은 전남도립공원인 천관산을 비롯해 억불산·제암산·사자산·수인산·부용산 자락이 병풍처럼 서서 길손을 포근하게 반겨주고, 전남 3대강인 탐진강은 56㎞ 물줄기를 이루며 장흥읍을 가로 질러간다. 동쪽으로 보성군·고흥군, 서쪽으로 강진군·영암군, 남쪽으로 완도군, 북쪽으로 화순군과 접하고 있다. 예로부터 찬란한 남도문화를 꽃피운 예술의 고장 예향이라 불려 문화유적을 많이 간직한 곳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쌓인 전통문화와 역사를 볼 수 있다.

특히 장흥 석대들녘은 동학농민 혁명과정에서 전봉준을 중심으로 하는 농민군 주력과는 별개로 이루어진 전투가 있었던 역사의 현장이다. 당시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부가 모두 체포된 이후에도 항전이 계속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지로서, 동학농민전쟁의 전체적 현황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유적지이며 반외세·반봉건을 지향하는 민족·민주운동을 지향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요즘, 물과 숲 치유를 테마로 한참 손님맞이를 하고 있는 이 곳 장흥의 지방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강성원지(江城院誌)

강성서원은 장흥군 유치면 월천리(月川里)에 있는 서원이다. 이 서원에 관계된 문헌들을 모아 이민수(李玟秀)의 서문을 붙여 1975년 4권 1책 석인본으로 간행했다. 향사인물은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과 풍암(楓菴) 문위세(文緯世)이다.

만수사지(萬壽祠誌)

만수사는 전남 장흥군 장동면 만수동에 있는 사우로 안원형(安元衡) ·안면(安勉)·안정생(安挺生)·주세붕(朱世鵬)·안중묵(安重默)·안중근(安重根)을 제향하는데, 여기에 관계된 문헌을 모아 김종가(金種嘉)의 서문과 김승식(金承植)·변시연(邊時淵)의 발문을 붙여 1973년 1책 연활자본으로 간행했다.

신편표제찬도환영지(新編標題纂圖寰瀛誌)

1770년에 위백규가 편찬한 유서(類書)를 그의 족손인 위영복(魏榮馥)이 새로 간행한 지리총서이다. 위백규의 서문, 목차, 범례, 본문, 족손인 위영복이 쓴 발문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에서는 󰡔구구주도(九九州圖)󰡕를 모방하여 중국의 13성과 우리나라의 8도 등을 분류하고 지도를 편찬하여 붙여서 ‘환영지’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범례에서는 편집체제와 방침에 대하여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정조(正祖)가 이 책을 구해 보기 원하여 집안에서는 없어졌지만, 친구의 집에 있던 정본(正本)으로 간행하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신편표제찬도환영지(新編標題纂圖寰瀛誌)

1822년에 위백규의 족손인 위영복(魏榮馥)이 새로 간행한 판본을 1925년에 전라남도 곡성(谷城)에서 출판한 것이다. 실학자인 위백규의 천하관, 지리관이 잘 드러나 있으며 우주도와 중국, 조선의 지도를 통해 인간사회를 규율하는 이념적 질서와 중국, 조선의 역사와 정치상을 도표로 포괄하여 나타냈다. 특히 조선팔도는 울릉도, 독도, 대마도 등을 표기하였고, 조선팔도총론에 8도의 민가 숫자, 속오군 숫자, 전결(田結) 등까지 기록해 놓아 조선 후기사회를 이해하는데 유용한 자료이다.

연곡서원지(淵谷書院誌)

1989년 서문은 김태경, 발문은 이충근(李忠根)이 썼다. 연곡서원은 장흥군 원도리에 있으며 민정중(閔鼎重)과 민유중(閔維重), 이민기(李敏琦)를 배향한 서원이다. 1698년 건립되었는데 민정중이 1675년 남인의 배척으로 장흥 벽사(현 장흥읍 원도리)에 귀양 와서 5년 동안 지방 후진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후에 풀려 나와 서울로 돌아감에 당시 민정중으로부터 학문을 배운 제자들이 그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서원을 건립하였다.

▲ 장흥군유림안

장흥군유림안(長興郡儒林案)

1983년 1권 1책 연활자본으로 간행된 장흥군유림안(長興郡儒林案)은 회칙, 윤리강령, 태학과 성균관의 연혁·문묘건립·오성·십철·송조육현·동국십팔현 등의 사실(事實), 석전제 관련 진설도, 축문, 유도회원의 명안(名案) 등이 주요 내용을 이루고 있다. 범례에 의하면, 전안(前案)의 읍면순서에 따라 연령순에 의하여 등재하고 회원등재 자격기준은 군유도회원으로 명시하고 있다. 장흥군의 유림들을 파악할 수 있는 인명정보원이다.

장흥군읍지(長興郡邑誌)

1871년 읍지상송령에 의해 작성된 ‘호남읍지’ 10책에 수록된 장흥군 읍지이다. 책의 항목은 채색 지도·읍기방향(邑基方向)·도리(道里)·건치연혁·군명·고적·형승·풍속·관직·군교각양원역(軍校各樣員役)·군총(軍摠)·공해(公廨)·창고사창(倉庫司倉)·방물진공(方物進貢)·물산·전선(戰船)·원호(元戶)·설진(設陣)·군기(軍器)·봉수·산성(山城) 등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뒤편에 벽사도속십역지(碧沙道屬十驛誌)와 회녕진지(會寧鎭誌)가 합책되어 있다.(규장각 지리지 해제 참조)

장흥도호부읍지(長興都護府邑誌)

표제가 ‘장흥도호부유사 읍지초(長興都護府遺事 邑誌抄)’이고 권말에 ‘무진사월십오일등서(戊辰四月十五日謄書)’로 되어 있으며, 장흥이 도호부로 불린 시기는 1895년까지이므로 작성연대가 1868년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구성 항목은 세조조에 진(鎭)을 설치한 내용·방리·도로 ·건치연혁·형승·관직·성씨 등이며, 부내방(府內坊)·부동방(府東坊) ·부산방(夫山坊)·유치방(有恥坊) 등 지역별로 기록해 두었다. 전체 편제는 1747년 ‘장흥읍지’와 비슷한데, ‘신증(新增)’부분을 두어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였고, 방포(方浦), 경내각성씨두관품직총서록(境內各姓氏頭管品職總敍錄) 항목은 본 읍지에만 기록된 것이다.(규장각 지리지 해제 참조)

장흥부읍지(長興府邑誌)

편찬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관직 항목에 1816년 6월 10일의 기록 뒤에서 두 번째로 기록된 이덕겸(李德謙)이 장흥부사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1816년이나 이와 가까운 시기에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 편제가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여지도서의 장흥부와 매우 다른데, 특히 일반적인 항목이 없고, 선창·군병 ·봉산·군향·수군·주소·해양·군기·육군기(陸軍器)·군량·입방군(入防軍) 등의 군사적인 내용의 항목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또한 이국선표박후거행사례(異國船漂泊後擧行事例)와 같은 항목이 있어 당시 조선의 외국과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장흥부읍지(長興府邑誌) 필사본

필사본 1책 11장으로 된 장흥군 읍지이다. 연대미상이나 항목의 순서, 체계 등을 살펴보면 1816년에 편찬된 ‘장흥부읍지’와 흡사하다. 권두에 채색지도가 실려 있고, 수록된 항목은 읍기·도리·지광·건치연혁·군명·고적·형승·풍속·관직·군교·군액·관방(關防) 등이다. 전반적으로 1816년에 편찬된 ‘장흥부읍지’ 보다 소략하며, 특히 군사관련 항목에서 입방군 외에 다른 항목이 없어 완결본이라 하기는 어렵다.

▲ 장흥원우록

장흥원우록(長興院宇錄)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산실된 기록을 ‘호남원우록’을 참고하여 장흥의 서원과 사당의 실적(實蹟)을 모아 1권 1책 1964년 석인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서문은 정노수(丁魯壽)·백광선, 발문은 이수평(李洙平) ·김평식(金平植)·위대환(魏大煥)이 썼다. 구성은 교궁전도(校宮全圖) 및 설립도, 창건연혁, ‘오성십철송조육현(五聖十哲宋朝六賢)’ ‘조선십팔선정실적사(朝鮮十八先正實蹟事)’ 등이 실려 있다. 원우록상과 하에 사액서원과 해당 사단(祠壇)의 창설년도를 기록하였다.

장흥읍지(長興邑誌)

‘호남읍지’ 9책에 수록되어 있다. 가장 앞쪽에 장흥도호부의 읍지가 있고 뒷쪽에 ‘벽사도속십역지(碧沙道屬十驛誌)’와 회녕진(會寧鎭)의 진지가 함께 있다. 장흥도호부의 읍지 부분은 1816년경에 간행된 ‘장흥부읍지’를 기본 토대를 따르고 있으나, 군액(軍額)·관방(關防)·선창(船艙)·군병·봉산(封山)·군향(軍餉)·수군 등의 항목은 삭제되고, 군선·완장부전답(元帳付田畓) 등의 항목이 추가되었다. 이외 군총, 회환미, 원호, 군기 등의 통계도 앞의 읍지와는 많이 다르다.(규장각 지리지 해제 참조)

장흥읍지(長興邑誌) 2책 합본

장흥군 읍지로 기존 읍지에서 장흥의 문무관직, 충의, 효열 등이 아직 기록되지 않은 것을 수정 보완하기 위해 장흥읍에서 간행한 것이다. 서문은 기우만(奇宇萬), 이재신(李載莘)이 썼다. 총 2책으로 합본되어 있다. 구성은 각각 1책에 읍선생안(邑先生案)·부동방(府東坊)·용계방(龍溪坊)·유치방(有恥坊)·장동방(長東坊) 순으로 되어 있고, 2책에는 안양방(安壤坊)·장서방(長西坊)·부평방(富坪坊)·남면방(南面坊)·고읍방(古邑坊)·회녕방(會寧坊) 등의 순으로 되어 있어 각 마을별로 연혁, 도로, 산정(山亭) 및 인물들을 확인할 수 있다.

▲ 장흥지

장흥지(長興誌)

장흥지방의 읍지는 영조조에 처음으로 편찬되었고, 1940년에도 간행된 바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1권에는 연혁·자연지리·풍속·인구분포 ·산업·세제 등이 열거되어 있고, 2권에는 서당·향사·불우·비각·총묘·군선생안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3권과 4권에는 장흥지방의 인물들이 등재되어 있다. 인물편의 수록항목은 타지방지와 대동소이하나, 1권의 항목 중 인구표가 세분화되었고 극장·신문지국·인쇄소·공장 등 1960년대의 시대적 상황과 배경을 엿볼 수 있는 항목들이 눈에 띤다.

전라남도지: 장흥군(全羅南道誌: 長興郡)

‘전라남도지’ 3권 첫 번째에 실려 있다. 건치연혁·지세산천·군소재 행정기관·관원·향교·학교·불우(佛宇) 등의 순으로 있는데, 삼림면적과 세속지(稅屬地)가 기록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다. 고적(古蹟) 부분도 다른 군과 큰 차이는 없으나 군액(軍額),진관(鎭管),관방(關防),봉수(烽燧) 등의 기록이 실려 있는 점이 특징이며, 누정 부분이 다른 군과 달리 누대와 정사로 나뉘어 기록되어 있다. 인물분류도 다른 군과 크게 차이 없이 명신·사마·문과·무과 등으로 분류되어 있다.

충정사유지(忠靖祠遺誌)

장흥부원군(長興府院君) 충정공(忠靖公) 마천목(馬天牧)을 비롯하여 동조(同祖)인 용암공(龍菴公) 응방(應房), 운암공(雲菴公) 응정(應井) 세 분을 배향한 충정사의 사우지(祠宇誌)이다. 충정사는 강진군 작천면에 소재하고 있다. 1책 6권의 연활자본으로 덕은(德殷) 송규헌(宋奎憲)이 서문을, 1924년 마주원이 발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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