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서 만난 호치민(5)
베트남에서 만난 호치민(5)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6.08.01 09: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 냐 산(NHA-SAN) 구경

1954년 12월부터 1958년까지 호치민이 살던 3칸 자리 집을 지나, 연못을 돌아서 2-3분 걸어가니 2층 목조 건물이 하나 있다.

이 집이 바로 호치민이 1959년부터 1969년 9월2일 별세할 때까지 살았던 집 ‘냐 산(NHA-SAN)’이다. ‘냐 산‘은 베트남 산악지대에 있는 2층 집으로 땅에 1.5m 높이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나무로 집을 짓는다. 아래층은 비워두고 위층이 주거공간이다.

 

 

 

   
▲ 5-1
   
▲ 5-2

냐 산 아래층에는 나무의자가 딸린 탁자가 놓여 있다. 이곳이 바로 베트남 정치국원들이 펜타곤의 미국 국방부와 대적한 전쟁지휘소이다. 한 구석에 구형 전화기가 두 대 놓여 있다.

▲ 5-3

철제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는 국가 원수가 사는 집이라고 도저히 믿기 어렵게 집무실과 침실뿐이다. 먼저 집무실부터 본다. 집무실에는 책상과 의자, 책장이 있다. 책상에는 타자기 한 대와 전기스탠드가 놓여있다.

▲ 5-4

바로 옆의 침실도 찬찬히 보았다. 침실에는 침대가 있고 책상이 하나 있다. 침대 위에는 전기스탠드와 시계, 침대 아래는 선풍기가 있고, 책상에는 모자와 라디오가 놓여 있다.

   
▲ 5-5
   
▲ 5-6

검소함과 절제의 냄새가 확 풍긴다. 명색이 국가 원수인데 소품이라곤 당랑 이것뿐이라니.

하기야 1969년 9월2일에 호치민이 죽었을 때 남긴 유산은 침대 하나, 책상 · 의자 · 책장 하나, 카키 옷 두 벌, 고무샌들 한 켤레, 라디오와 골동품 시계 하나, 타자기 한 대 뿐이었다. 언젠가 호치민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치는 부패보다 더 나쁘다.” (송필경, 왜 호찌민인가, 에녹스, 2013, p 253)

그런데 왜 호치민은 1959년부터 이런 집에서 살았을까? 그것은 베트남 통일혁명의 완수를 위하여 초심으로 돌아가고자 함이었다. 1930-40년 대 독립투쟁시절에 산악지대의 냐 산에서 지냈던 그 시절로 돌아가 자신을 채찍질하며 오직 조국 통일을 향한 일념(一念)을 불태우기 위함이었다. 주1)

#2. 베트남 통일의 열망

그러면 1954년 7월 제네바 협정 이후의 베트남 상황을 알아보자. 베트남은 17도 선을 경계로 남북 분단이 되었다. 북베트남은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민주공화국(소위 월맹)’이, 남베트남은 1954년 7월7일 바오 다이 국왕에 의해 전격적으로 총리가 된 응오 딘 지엠 (1901-1963)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한편 제네바 협정에 따라 민간인의 자유 이동은 어느 정도 보장되었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지엠은 북베트남의 카톨릭 신자들에게 북에 남아 있으면 큰 재앙이 닥친다는 소문과 함께 남쪽에 내려오면 프랑스인의 토지를 주겠다는 회유책을 폈다. 그리하여 1954년 10월에 소지주와 카톨릭 신자 85만 명이 남베트남으로 내려왔고 지엠은 지지 세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주2)

이 여세를 몰아 지엠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1955년 10월26일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왕정을 폐지시켰다. 그리고 ‘베트남공화국(소위 월남)’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한편 제네바 협정에 따라 1956년 7월에 남북 베트남 전체에서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호치민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남베트남 정부는 총선을 거부했는데 미국도 이를 지지했다. 미국의 의도는 베트남의 남북분단 고착화였다.

1956년 7월6일에 호치민은 북베트남 국민들에게 연설을 했다. 그는 베트남의 영구분단을 노리던 미 제국주의 세력과 남부 친미정권이 자유 총선거가 열리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다고 하면서, 민족해방이라는 과업을 완수할 수 있도록 단호하게 투쟁할 것을 다짐했다. 아울러 그는 통일 독립 베트남을 만들기 위하여 단결하자고 호소했다. (호치민 지음, 배기현 옮김, 호치민 식민주의를 타도하라, 프레시안북, 2009, p 216-218)

주1) 당초 북베트남 정부는 호치민에게 주석 명칭에 걸맞게 화려하고 큰 집을 지으려고 하였단다. 그러나 호치민은 “주석은 국민의 심부름꾼이다. 왕이 아니다”라고 단호히 거부했다 한다.

주2) 이와 반대로 프랑스에 대항하여 레지스탕스 활동을 한 게릴라와 베트민 가족들 8만 명은 북베트남으로 돌아갔다. (마이클 매클리어 지음 · 유경찬 옮김, 베트남 :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3, p 105)

최신 HOT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