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기록문화유산 (27) 나주 지방지
호남기록문화유산 (27) 나주 지방지
  • 나상필 호남지방문헌연구소 연구원
  • 승인 2016.07.28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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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지방문헌연구소는 2002년부터 호남지역 고문헌 정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20세기 호남지역 근대 문집 조사 연구’, ‘호남지역 간행본 문집에 대한 조사 연구’, ‘호남 필사본 문집 조사 연구’, ‘약 3,000종으로 추정되는 호남의 한문 문집 조사 연구’ 등 호남지역 고문헌 관련 연구를 진행해 오고 있다.

호남의 기록문화유산 중 지방지는 지역에 대한 정보를 가장 세밀하게 담고 있는 것으로, 지방지에 대한 관심이 지역을 이해하는 지름길이라 할 수 있다. 호남지방문헌연구소에서는 지방지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인식하여 지방지 관련 전시회를 개최하였고, 호남기록문화유산 홈페이지에 호남지방지 기초DB를 구축하고 있으며, 1,200여 종의 호남지방 지방지에 대한 기초정보와 간명해제를 담은 책 ‘호남지방지 기초목록’(전남대학교 출판부, 2014)을 출간하기도 했다.

호남지방문헌연구소에서는 그 동안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호남의 지방지를 소개하는 글을 기고하고 있는데 마지막으로 나주 지역의 지방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나주는 청동기시대부터 현전하는 많은 지석묘의 유적으로 보아 서남해지방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고 마한시대에는 대형 옹관고분 유적·유물로 보아 마한의 지배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시대에는 발라군이었다가, 신라 경덕왕이 금산군으로 고쳤다. 후백제시대에는 견훤이 이곳을 본거지로 삼았고, 후에 고려 태조 왕건이 점령하여 나주라 개칭하였다. 이처럼 나주는 긴 세월동안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은 지역이니 본 호를 통해 나주 지역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거평사지

거평사지(居平祠誌)

서문은 윤요중(尹堯重), 발문은 오두삼(吳斗三)이 작성하였다. 서문과 발문에서는 서원철폐령 이후 거평사(居平祠) 중수과정과 배향인물 노신(魯愼), 노인(魯認), 노홍(魯鴻)의 활동을 설명하였다. 본문은 상·하편으로 구성되었다. 상편은 거평사 연혁, 중건과정, 향사(享祀) 절차와 규범 내용을 기록하였다. 하편에는 강학(講學) 예절, 향사(享祀)에 필요한 제기(祭器) 등 사우 운영과 관련된 내용을 정리하였다.

경현서원지(景賢書院誌)

김굉필(金宏弼)을 배향하는 경현서원(景賢書院)에 관한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1983년에 간행되었다. 구성은 서문, 본문, 발문 순으로 되어 있다. 서문은 최선진(崔善鎭)·윤요중(尹堯重), 발문은 정동채(鄭東采)가 작성하였고, 서원의 건립과정, 연혁, 서원지 간행의 중요성을 설명하였다. 본문은 배향인물과 서원의 운영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1권은 경현서원의 연혁과 배향인물에 대해 소개하였다. 2권에는 배향인물 행적을 정리하였다. 3권은 강당 중수과정에 참여한 사람의 명단과 기부금을 기록하였다.

▲ 계간사지

계간사지(谿磵祠誌)

서문은 윤요중(尹堯重), 발문은 김대석(金大錫)이 작성하였고, 사우 건립과정과 사우지(祠宇誌) 간행배경을 설명하였다. 본문은 계간사(谿磵祠)와 배향인물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였다. 1권은 계간사 연혁과 향사절차 관련 내용을 기록하였고, 2권에서는 배향인물의 주요 행적을 기록하였다. 3권에서는 사우 복설과 관련하여 복설에 참여한 문중과 기부금을 기록한 부성록(扶成錄)과 사우 복설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은 통문(通文)을 정리하였다.

금성속삼강록(錦城續三綱錄)

나주지역 충신·효자·열녀의 행적을 약전(略傳) 형식으로 모아 1893년 나주향교에서 발행하였다. 서문은 기우만(奇宇萬), 발문은 임병순(林炳純)이 작성하였고, 후세의 풍교(風敎)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나타냈다. 범례에서는 편제순서와 ‘금성이충렬록’(1802년) 내용을 참고하여 작성한다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본문은 효·충·열을 순서로 그 아래 증포(贈褒), 미증포(未贈褒)로 구분 후 해당 인물의 선조를 밝히고, 관력(官歷) 행적을 기록하였다.

▲ 금성속삼강록

금성읍지(錦城邑誌)

나주목(羅州牧)의 인문·지리 내용을 기록한 읍지로 1897년 나주 유림들이 간행한 사찬 읍지이다. 표제의 ‘금성(金城)’은 나주의 별호(別號)이다. 구성은 서문, 본문 순으로 되어 있고, 발문은 없다. 서문은 이인상(李麟相)·나도우(羅燾佑)가 작성하였고, 이전에 간행된 나주지역 읍지의 오류를 수정할 목적으로 ‘금성읍지’를 간행했음을 설명하였다. 본문은 나주목 현황이 기록된 1권과 과거시험·효·충·열에서 모범을 보인 인물의 활동 내용을 정리한 2권과 3권이 있다.

금성이충렬록(錦城李忠烈錄)

나주지역의 효자·충신·열녀의 행적을 모아 정리한 책이다. 1802년 김세연(金世淵)·고정헌(高廷憲)·이인채(李寅采)가 3권 2책 목활자본으로 발행하였다. 서문은 김세연·고정헌, 발문은 이인채가 작성하였고, 삼강(三綱)에서 귀감이 되는 인물의 행동을 후세에 전할 목적으로 간행했음을 밝혔다. 범례에서는 본문에 기록된 인물들을 나이에 따라 편제한다는 기준을 제시하였다. 본문에서는 효자·충신·열녀로 구분하고, 해당 인물의 자(字), 관직경력, 활동상황 등을 기록하였다.

금호사지(錦湖祠誌)

서문은 김황(金榥), 발문은 이민수(李玟秀)가 작성하였다. 여기에는 나주나씨(羅州羅氏)의 효행 기록을 남길 목적으로 ‘금호사지’를 발간했음을 언급하고 있다. 본문은 금호사(錦湖祠)의 향사, 강학, 소장문서, 배향인물에 대해 기록하였다. 1권은 ‘금호나선생봉안문(錦湖羅先生奉安文)’과 강학 과정을 그린 ‘상읍례도(相揖禮圖)’를 정리하였다. 2권은 실기(實記)를 통해 배향인물의 행적을 기록하였고, 3권은 운영과 관련된 내용을 정리하였다.

나주군읍지(羅州郡邑誌)

형식과 내용은 ‘나주목여지승람(羅州牧輿地勝覽)’과 동일하다. 그러나 갑오경장 이후의 상황을 자세히 기록해 놓고 있어 그 의미를 더한다. 방리 항목의 마지막 부분에 “갑오경장 이후에 각 도는 지도군에 이속시켰다”는 내용이 나온다. 도서 항목에도 이속된 사실이 나온다. 균세, 군액, 관방 등의 항목에도 “갑오경장 이후에 폐지하였다”라는 내용이 나오며, 단묘의 내용과 같은 항목의 뒤에도 “각 서원은 모두 훼철되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건치연혁, 관직의 항목은 갑오경장 이후의 내용을 반영하지 않았다. 1899년 전국의 모든 고을을 ‘군’으로 편제하면서 나주목에도 변화가 있었으나 반영되어 있지 않다. 앞쪽에는 당시의 지도가 첨부되어 있다.

▲ 나주문헌호보

나주문헌호보(羅州文獻號譜)

나주지방에서 역사적으로 유학, 문장에 뛰어나거나 덕이 있는 인물들의 호를 적은 인명록이다. 서문은 이민선이 썼고, 발문은 오대선(吳大善)이 작성하였다. 2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상권에는 신라 때부터 조선 광해군 때까지의 인물이 수록되어 있고, 중권에는 인조부터 철종 때까지의 인물, 하권에는 고종과 순종때의 인물들이 차례로 실려 있다. 수록방식은 호를 먼저 적고 그 아래 성명, 자, 본관, 과거급제여부, 관직, 특별한 이력 등이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부록으로 임원록이 들어 있다. 나주의 향토인물정보원이라 할 수 있다.

나주원우록(羅州院宇錄)

나주지방에 존재했던 서원·사우의 연혁 및 배향인물을 정리한 책이다. 편저자와 간행년도는 미상이다. 나주지역 서원·사우 기록이 멸실되어, 서원의 위치와 배향인물을 기록해 둔다고 하였다. ‘나주원우록’의 구성은 나주지역에서 배향하고 있는 인물 소개 후 나주지역 서원·사우의 연혁 및 배향인물에 대해 설명하였다. 기재된 서원·사우는 26개로 서원 6개, 사우 20개이다. 서원·사우에 배향된 인물 97명의 이름과 본관이 기록되었다.

▲ 나주청금안

나주청금안(羅州靑衿案)

나주향교(羅州鄕校)에 적을 두고 있던 양반유생 명단이다. 1893년 윤상익(尹相翊)이 작성한 ‘청금록(靑衿錄)’을 참고해 그 이후 변화된 내용을 추가하였다. 구성은 나도우가 쓴 서문, 청금안 순으로 되어 있고 발문은 없다. 유학 풍습이 강한 나주의 지역성을 설명하였고, 본문인 청금안에는 유생의 이름, 본관, 선조와 관련된 사항이 기록되었다. ‘나주청금안’에 입안된 유생은 718명이고 나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와 그 외 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가 섞여 있다.

나주향교지(羅州鄕校誌)

▲ 나주향교지

나주향교는 성의 서쪽 장원봉 아래 지금의 향교리에 있다. 나주향교의 문적은 완본이 거의 산일되어 ‘태학지(太學志)’를 참고하여 본서를 기술하였다. 서문은 정해(丁亥) 7월 하순에 함평 이민선이 썼다. 내용과 형식은 조선시대 일반 향교지와 비슷하다. 권수에 향교전도를 비롯하여 제기도, 예복도 등이 상세히 실려 있으며 부편(附編)에 나주원우록이 있는데, 오헌수(吳憲洙)의 서문이 있다.

남평군읍지(南平郡邑誌)

정확한 편찬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균세 항목이 수록되어 있고, 노비 항목에 호조와 성균관 노비가 기록되어 있어, 1801년 공노비(公奴婢) 혁파 이전에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1789년에 편찬된 읍지들의 항목과 그 형식이 일치하여 그 시기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표제가 ‘남평군읍지(南平郡邑誌)’인데, 남평은 1896년 지방 제도 개편 때에 ‘군(郡)이 되었으므로, 표제는 1896년 이후에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편제는 건치연혁·군명·관직·방리·도로·성지·산천·성씨·풍속·학교·서원·단묘·공해·관방·봉수·제언·장시·교량·역원·사찰·누정·형승·물산·진공·상납·호구·전총·전세·대동·균세·봉름·요역·창고·조적·군기·군액·노비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 모산사지

모산사지(茅山祠誌)

모산사는 전라남도 옛 나주, 현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에 있는 사당으로 모효재(慕孝齋) 정문손(鄭文孫)·하곡(霞谷) 정운용(鄭雲龍)·충장(忠壯) 정운(鄭運) 등 하동정씨 세 명을 배향한 사당으로 정문손의 후손 충현(忠鉉)·계채(桂采)·순규(淳圭)·기봉(淇琫)·익채(益采)·순문(淳文) 등이 세운 것이다. 본서에는 세 명의 봉안문을 비롯하여 행장·시장(諡狀)·위치도·향사일(享祀日)·제문·계안 등이 수록되어 있다. 서문은 최병하(崔炳夏), 서후(序後)는 하곡의 후손인 정홍채(鄭泓采)가 썼다.

나주지역 지방지 안에는 다양한 나주의 제도, 인물, 풍습, 서원, 변화 등 역사적으로 변천하면서 나주지역의 성장과정과 나주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어 지역문화의 발전과 계승의 면에서도 가치가 있으며 지역연구를 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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