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선물
여름의 선물
  • 문틈 시인/ 시민기자
  • 승인 2016.07.13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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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별로 여름을 타는 편이 아니다. 사람들이 덥다, 덥다 하고 부채질을 하는 더위에도 무덤덤한 편이다. 열대야 밤에도 잘 때는 창문을 다 닫고 얇은 이불을 덮고 잔다. 아내는 그런 나를 온도차가 커서 자기와는 같이 지낼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렇다 해도 입때껏 부부로 살아왔으니 한낱 투정이려니 한다.

아내는 내가 볼 때 지나치게 여름을 타는 것 같다. 여름에 공포를 느끼며 산다니. 강원도 산골 같은 데 가서 한 달쯤 여름을 피해 있다 오라 해도 손사래를 친다. 내가 계절에 둔한 건지 아내가 민감한 건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여름의 낭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오래된 팽나무 옆 동각에서 목침을 베고 여름밤을 지냈던 어린 시절도 있었다. 개울물에 수박을 넣어두었다가 밤에 매캐한 모깃불을 피워놓고 동네 형들과 수박을 쪼개 먹던 추억은 여름이 준 아름다운 추억이다.

당신이 보낸 여름이라는 말 앞에 첫 자(字)를 붙여보라. ‘첫여름‘이라고 말하는 순간 길고도 짧은 이야기가 시작된다. 다른 어느 계절에도 ‘첫’ 자를 앞에 쓸 수 없다. 오직 여름만이 접두어로 그 글자를 허락한다. 여름에는 뜨거운 이야기들이 산과 바다와 먼 길에서 시작된다. 결국은 추억이 되고 말 것이지만.

아마 이때쯤이었을 것이다. 나는 맨날 아스팔트를 딛고 사는 도시 생활에 질려 맨발로 땅을 밟아보고 싶어서 불쑥 회사에 이틀 휴가계를 내고는 무작정 남쪽으로 갔다. 해남 어디였다. 수리조합이 있었고 주위에 잔솔밭이 있었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사람은 자취도 없었다. 나는 옷을 벗어 아무렇게나 솔밭에 내던져두고 물속으로 덤벙 뛰어들어 몸을 담갔다.

부드러운 물의 손들이 내 몸을 만져댔다. 피라미들이 작은 주둥이를 내 겨드랑이며 허벅지에 함부로 쿡, 쿡, 입질을 했다. 간지러웠다. 그 큰 수리조합에 나 혼자였다. 물에 들어갔다가 솔밭으로 나왔다가 해종일 그렇게 지냈다. 온몸이 행복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나는 그날 낙원에 있었던 듯하다.

태양은 이글거리며 물과 솔밭과 벌거벗은 사내를 투명하고 뜨거운 빛으로 감쌌다. 물가를 걷는 발가락 사이사이로 진흙이 삐죽 솟아올랐다. 아, 그 맨발에 닿는 흙의 감촉이라니. 오후 늦게 집으로 돌아갔다. “네 얼굴이 벌겋게 달았구나. 술 먹었니?” 어머니가 걱정하는 투로 말했다. 나는 머리를 모로 저었다.

해남 어디 수리조합에서 태양과 함께 어울려 놀다 온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른 데다 쓰리고 욱신거리고 여기 저기 살갗이 아프기까지 해서 제대로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한 여름의 태양에 그슬렸으니 왜 안 그렇겠는가.

하얀 붕산연고를 온몸에 바르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긴’ 여름밤을 뜬 눈으로 샜다. 그날 밤 하늘에서는 눈싸움하듯이 별들이 서로 유성을 내던지며 한여름밤의 빛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첫여름이라고 한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 전 여름도 아니고 그 후 여름도 아니고 그 여름에 일어난 일이 내게는 무엇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 첫여름이었던 것이다. 이렇듯이 여름에는 흔히 별난 자기만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여름이 더운 것은 익어가는 이야기가 시작되려고 그러는 것이리라.

시인 이육사는 ‘내 고장 칠월은/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라고 노래했다. 그는 이 시 마무리에서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하고 오는 손님을 그린다. 학생 시절 이 시에 뻑 갔다.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놓고 잘 익은 포도송이를 따와 그리운 이와 함께 먹는 상상을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시 역시 시인의 이야기가 시작됨을 짐작할 수 있다.

여름에는 구름들도 이야기꾼처럼 이리 저리 떠돌아다닌다. 뭉게구름이 궁전처럼 혹은 산맥처럼 하늘에 거대한 이야기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여름의 위대함에 압도당한다. 웅장한 여름의 자태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해를 피하려 그 여름날에 썼던 밀짚모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구름이 벗겨가지고 아무도 모르는 어딘가에로 사라져갔으리라. 밀짚모자가 그립고 그 시절의 구름이 그립다. 온몸이 태양의 입술에 탔던 그날은 아득히 흘러갔지만 해마다 내게는 밀짚모자를 벗겨간 첫여름이 온다.

청포도가 익어가는 칠월이지만 라디오는 외출을 삼가라 한다. 오존과 자외선, 폭염이 건강을 해친다고 경고한다. 옛날엔 그저 마을 어귀의 동각이나 방죽에서 뒹굴며 여름을 지내면 좋았는데 해가 갈수록 여름은 무서운 괴물 이미지로 변하고 있다.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거나 말거나 나는 여름을 찬미한다. 쫘악 하고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고 나면 마당에서 훅 끼쳐오는 흙냄새를 어느 계절에 맡을 수 있으랴.

여름에는 당신에게서 흙냄새가 난다. 나는 흙냄새 나는 사람들이 좋다. 자신의 생애에서 작달비를 경험하지 않고, 흙냄새를 맡지 않고 살아왔다면 아무리 잘 나간다 해도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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