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 수용소 소견(10) - 생체실험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견(10) - 생체실험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6.07.11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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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 인류 최악의 실험

2013.1.31. 조선일보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최근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인류 최악의 실험 Top 10’이라는 제목의 글이 화제가 되고 있다. 공개된 최악의 실험 1위는 나치가 유태인을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이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끔찍한 생체실험의 현장이었다. 나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일본의 731부대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의 윤동주에 대한 생체실험보다 더 잔혹하게 유대인이나 집시를 상대로 생체실험을 하였다.

이 실험들은 멩겔레의 쌍둥이 실험, 클라우베르크의 불임시술과 호르스트 슈만의 엑스레이 요법, 히르트의 해부학 실험 등이었다. 주1)

#2. 집시 아이들

제6블록 3실에서 뼈만 앙상한 네 명의 아이 사진 한 장을 보았다. 이 사진 아래에는 ‘요제프 멩겔레의 의학실험에 희생된 집시 아이들 (Gipsy children victims of medical experiments of Josef Mengele)’ 이라고 적혀 있다.

요제프 멩겔레(Josef Mengele 1911 ~ 1979). 그는 나치 친위대(SS) 장교이자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내과의사였다. 그는 수용소로 실려 온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내는 선별작업을 했는데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하여 악명이 높았다. 그의 별명은 ‘죽음의 천사(Angel of Death)’였다.

멩겔레는 독일 소도시 귄츠부르크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히틀러에 매료되어 국가사회주의에 사로잡혔고 ‘아리안 인종의 우월성 연구’에 참여하는 일을 소명으로 여겼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유전 생물학 및 인종 위생학 연구소에서 일하면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1938년에 친위대원이 되었고 1940년에 작전에 참여하였다. 1942년 러시아 전선에서 부상을 당한 그는 전투 부적합 판정을 받았으며 친위대 대위로 진급하였다.

멩겔레는 1943년 5월부터 아우슈비츠의 군의관으로 일하면서 새로 도착하는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내는 선별작업을 했다. 그리고 수감자들을 이용하여 유전학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였다. 그는 특히 쌍둥이들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유전적 성질이 동일한 인간끼리 비교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쌍둥이들은 주로 집시들이 실험 대상이었는데, 이들은 등록번호와 별 외에도 독일어로 ‘쌍둥이(zwilling)’를 뜻하는 ‘ZW’ 견장을 새롭게 달았고 특별 막사에 따로 수용되었다.

멩겔레에 의한 쌍둥이에 대한 X레이 실험 결과

‘로마’라고 불리는 집시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23,000명이나 끌려왔는데 13블록에 집시전시관이 있다. (사진 10-3)

힘러의 ‘아우슈비츠 명령’으로 나치는 유럽전역에서 50만 명의 집시가 학살했다. 이 학살을 어떤 학자는 “잊혀진, 또 하나의 홀로코스트”라고 부른다.

#3 난쟁이 실험

멩겔레는 난쟁이에게도 관심이 많았다. 멩겔레는 열등한 인종을 통해 매개되는 유전자 이상이 성장 장애에 반영된다고 생각했다.

난쟁이들 중에는 오비츠(Ovitz) 가족도 있었다. 루마니아 출신의 예술가 가족인 이들은 열 명의 가족 중 7명이 난쟁이였으며, 끌려오기 전에는 릴리풋 곡예단(Lilliput Troupe)이라는 이름으로 동유럽을 다니며 공연을 하였다.

멩겔레는 이들에게서 척수 · 혈액 · 치아 · 머리카락 샘플을 채취했고, 고관들이 방문했을 때 나체로 행진하게 했으며, 자신이 좋아하는 곡조를 연주하게 했다. 기적적으로 이들은 살아남았다. (미셸 시메스 지음 · 최고나 옮김, 나쁜 의사들, 책담, 2015, p 136)

▲ 블록 생체실험장

#4. 실험 후 해부

멩겔레의 실험들은 과학적 가치가 모호한 것들이 많았다. 파란 눈동자로 변하는지 보려고 아이들의 눈에 파란 색 물감을 주사하는 실험을 했고, 사람들의 피를 서로 바꿔 넣기도 했으며, 심지어 샴쌍둥이를 만들기 위해 외과적으로 등을 접합시키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멩겔레는 전범(戰犯)재판도 받지 않고 브라질로 도망가서 숨어 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1979년에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바다 수영을 하던 도중 심장마비로 인해 사망하였다. 이 사실은 이빨을 통한 DNA 검사로 1993년 신원이 확인되었다.

주1) 나치는 나츠바일러 수용소등 다른 수용소에서도 독가스 해독제 실험 등 여러 실험들을 하였다. 이런 실험은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는데 SS 친위대장 하인리히 힘러가 최고 책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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