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를 따라간 소년
무지개를 따라간 소년
  • 문틈 시인/시민기자
  • 승인 2016.07.07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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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아이들은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시냇물에 들어가 쇠꼬챙이로 냇물 바닥을 콕 콕 찌르며 자라를 잡곤 했다. 자라는 냇둑 풀섶에 하얀 알을 낳곤 했는데, 자라는 흔히 냇물 모래 속에 숨어 있었다. 자라를 잡으면 함평장에 가지고 가서 돈과 바꾸어 ‘난닝구’ 따위를 사오곤 했다.

아이들이 자라를 잡는 동안 소년은 둑에 앉아서 구경만 했다. 자라는 입이 단단해 쇠젓가락도 물면 분지러뜨린다는 말도 있었고, 무엇보다 살아 있는 자라를 잡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아서였다.

어느 날 그날도 그렇게 둑에 앉아 있었는데 조금 떨어진 둑에서 무지개가 솟아올라 하늘로 뻗쳐 있는 것이 보였다. 소년은 놀랍고 신기해 저도 모르게 일어나 바로 저만치 있는 그 신비한 무지개를 향해 발걸음을 떼었다. 영롱한 오색 무지개가 바로 눈앞에서 소년을 손짓해 부르는 것만 같았다.

무지개가 솟아난 곳에는 무슨 보석 항아리 같은 것이 파묻혀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던 듯하다. 꼭 그런 이야기가 아니어도 한 열 걸음만 아니, 스무 걸음만 가면 바로 무지개를 잡아 볼 수 있다는 설레임에 무지개가 솟아난 곳으로 걸어갔다.

한데 이상하게도 무지개가 있던 곳에 가면 무지개는 꼭 아까 본 거리만큼 떨어져서 솟아나 있었다. 소년은 마치 무지개에 홀린 듯 무지개를 잡으러 달려갔다. 그렇게 계속 소년은 저만치 떨어져 있는 무지개를 쫓아갔다. 얼마나 그렇게 무지개를 따라갔는지 모른다.

무지개는 냇둑이 휘어진 곳에 이르자 모내기를 마친 논바닥으로 옮겨갔다. 논바닥에 솟아있는 무지개가 마치 모를 낸 논바닥으로 들어오라는 듯이 그 자리에서 색깔을 빛내고 있었다. 무지개는 하늘높이 치솟아 황홀한 모습이었다.

소년은 논바닥으로 들어갈까, 어쩔까 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자라를 잡는 아이들이 멀리 보였다. 아이들로부터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런데 무지개는 논바닥에서 타오르듯한 모습으로 소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년은 홀린 듯 고무신을 벗고 논바닥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런데 무지개는 냇둑에서 그랬던 것처럼 가까이 가면 또 그만큼 멀어져 가 있었다. 소년은 울고 싶었다. 왜, 무지개는 꼭 그만큼 떨어져 있는 것일까. 소년은 망설였다. 아이들로부터 너무 멀리 온 데다 무지개가 다가가면 자꾸만 물러서는 통에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고 망설였다.

게다가 바닥은 냇둑이 아니라 모가 심어져 있는 논바닥이었다. 소년은 신발을 벗어둔 냇둑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무지개를 바라보니 무지개는 학다리 들판으로 아주 멀리 가버렸다. 소년은 두 손에 신발을 한 짝씩 들고 흙이 묻은 맨발로 냇둑을 걸어 자라를 잡고 있는 아이들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아이들은 이미 자라 잡이를 마치고 마을로 돌아가고 있었다. 소년이 오기를 기다려준 옆집에 사는 병관이가 말했다. “너 어디 갔다 오는 거니? 이봐, 너 울고 있잖아.”

소년은 소리내어 엉엉 울고 있었다. 왜 울고 있는지도 몰랐다. 바짓가랑이가 흙투성이가 되어 어머니한테서 혼날 걱정을 한 탓은 아니었다.

그러고 나서 50년도 더 지났다. 소년은 일평생 그 무지개, 어린 시절 잃어버린 무지개를 잊지 못한 채 어른이 되고 늙어갔다. 세월이란 누가 무지개를 잃어버린 것을 잊지 못하건 어쩌건 간에 그런 따위엔 관심이 없다. 그처럼 무섭고 냉랭하게 지나가버린다.

소년은 삶이 고달플 때마다 도시생활에 지쳐 시골로 돌아가고 싶을 때마다 바로 눈앞에서 자기를 오라고 하던 그 무지개를 떠올렸다. 그는 생각하곤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 세상에 무지개를 찾으러 온 것은 아닐까 하고.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무지개를 찾으러 온 사람들이다.

무지개는 아무리 달리 생각한다 한들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 태어난 생명을 찬양하는 영광이요, 행복 같은 것이리라. 이 우주의 신비를 푸는 리본 같은 것이리라. 로마의 가톨릭 교황 비오12세는 “사람은 어린 시절의 꿈으로부터 멀어질수록 불행해진다”고 했다.

나는 바로 내 눈앞에서 빛나던 무지개를 바라보고 따라갔던 그 아름다운 날을 잊지 못한다. 가슴을 설레게 하던 무지개는 지금 어딘가에서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어쩌면 인생을 힘들고 어렵게 살아온 날들이 무지개를 찾아 헤매온 날들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내 가슴 속에는 세월이 암만 가도 자라지 않는, 무지개를 따라가던 어린 소년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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