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서 만난 호치민(3)
베트남에서 만난 호치민(3)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6.07.01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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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 하노이 주석궁

1946년 12월19일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났다. 1946년 3월6일에 베트남과 프랑스가 잠정합의를 공식화하기 위한 퐁텐블로 회담이 깨진 여파였다. 1946년 6월에 호치민은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협상을 계속하였으나 회담은 9월10일에 깨지고 말았다. 9월11일에 호치민은 뉴욕타임즈 기자와 회견을 하였다. “전쟁이 불가피하냐?”는 질문에 호치민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전쟁은 불가피합니다.”

11월20일에 프랑스 순양함은 하이퐁 항에 포격을 가했다. 호치민이 중국으로부터 무기를 반입하고 있어 항구를 봉쇄한 것이다. 12월17일에 프랑스는 하노이를 공격했다. 12월20일에 호치민은 ‘전 국민에 항전을 호소한다!’는 라디오 방송을 하고 전쟁에 돌입하였다.

우리는 평화를 원했기 때문에 양보를 했다. 그러나 우리가 양보하면 할수록 프랑스 식민주의 세력은 더 많이 요구했다. 이제는 그럴 수 없다. 우리는 노예가 되지 않기로 했다. 동포들이여 일어나라! 총 가진 사람은 총을, 칼 가진 사람은 칼을 들라. 칼 없는 사람은 삽과 호미, 몽둥이를 들라. 나뭇가지라도 들라.

우리의 저항은 길고 고통스러울 것이지만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 조국 베트남이 완전 독립하여 다시금 하나로 통일되는 그 날까지! (송필경 지음, 왜 호치민인가?, 에녹스, 2013, p 314-315)

전쟁이 일어나자 프랑스 기자가 호치민에게 물었다.

“근대식 무기도 없이 프랑스와 싸우는 것은 무모하지 않는가요?”

호치민의 대답은 간결했다.

“인간의 정신은 인간이 가진 무기보다 강합니다.”

전쟁 초기에 프랑스는 하노이를 비롯한 베트남 북부와 중부의 주요지역을 점령했다. 호치민은 북부 산악 지대에 피신하여 장기전에 돌입하였다.

1947년 6월19일에 호치민은 항전 6개월의 상황을 국민들에게 알렸다. 그는 승리가 확실해지고 있다고 자신감을 피력했다. 호치민은 “(1)이 전쟁이 정의로운 전쟁이니만큼 정의는 승리할 것이다. (2)우리 동포들이 더욱 일치단결하고 있다. (3)우리에게는 용감한 전사들이 있다. (4)우리의 전략이 옳았다. 즉 장기전 · 게릴라전으로 인하여 프랑스군은 더욱 고통스러워지고 있다. (5)아시아 민족과 전 세계 여론이 지지하고 있다”는 5가지 사항을 언급하면서, 저항전이 길어져도 우리는 기필코 승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호치민 지음 · 배기현 옮김, 호치민 식민주의를 타도하라, 프레시안 북, 2009, p 110-112)

그러나 호치민은 프랑스에게 계속 고전(苦戰)하였다. 더구나 프랑스는 호치민 정부를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폐위된 황제 바오다이를 데려다 새로운 베트남 정부를 만들었다. 분열 작전이었다.

드디어 1947년 10월7일에 프랑스는 베트남 본부 비엣 박을 공격하였다. 호치민 체포는 시간문제였다. 다행히도 호치민은 간발의 차로 프랑스군을 따돌릴 수 있었다.

한편 프랑스의 예측과는 달리 베트남의 저항은 끈질겼다. 더구나 1949년 10월에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했다.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이 장개석의 국민당을 중국 본토에서 몰아낸 것이다. 베트남은 중화인민공화국의 도움으로 군사력이 급격히 강화되었다.

1950년 6월25일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인도차이나 전쟁의 의미도 달라졌다. 처음 시작 때에는 베트남 독립 전쟁이었던 것이 이제는 동서 냉전(冷戰)구조 속에서 열전(熱戰)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런데 미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호치민은 농민을 효과적으로 동원할 체계를 갖추었고, 더구나 1953년에 단행된 토지개혁으로 농민은 ‘내 땅’을 갖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농민은 국가에 더욱 헌신적인 모습을 보였다.

1953년 말에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은 베트남의 중부와 북부 지방 대부분을 장악하였고 좀 더 큰 도시들도 사실상 포위상태에 있었다. 또한 베트남 남부에도 베트민이 심어둔 첩자들이 암약하면서 프랑스의 정책을 방해, 교란했다.

수세에 몰린 프랑스는 베트남 북부의 작은 도시 디엔 비엔 푸에 요새를 만들고 병력을 집중시켰다. 이 소식을 접한 호치민은 1954년 1월 중순부터 총 공격을 하였다. 베트남군은 5만5천명, 프랑스군은 1만6천명 정도였다.

5월초에 베트남군은 외곽 방어선을 뚫고 내부 요새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5월6일 베트남군은 최종 공격을 하였다. 프랑스군 사상자는 5,500명, 베트남 사상자수는 2만5천명에 달해 베트남의 희생은 컸지만 이 날 프랑스는 완전히 패배했다. 이리하여 베트남은 80년에 걸친 프랑스 식민 지배에서 벗어날 계기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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