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기록문화유산(22)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세계지도를 손수 그린 호남인
호남기록문화유산(22)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세계지도를 손수 그린 호남인
  • 양형란 호남지방문헌연구소 연구원
  • 승인 2016.06.23 15: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하백원 18-19세기 호남실학의 꽃을 피우다

실학은 집권지배층인 양반을 위한 학문이라기보다는 재야의 학자들이 백성들의 고통을 몸소 체험하면서 민생을 안정시키고 구국의 충심을 발휘하여 학자적 신념에 따라 민생을 살피고 강구하여 실천해가는 것이다. 이렇듯 실학은 인간의 기본권과 존엄성을 존중하는데서 출발하여 시대 흐름에 따라 결실을 맺었으니, 이것으로 근대 개화사상이 아름답게 꽃피울 수 있었다.

하백원은 순창의 신경준(申景濬), 장흥의 위백규(魏伯珪), 고창의 황윤석(黃胤錫)과 함께 호남의 4대 실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전남 화순을 근거지로 지도뿐만 아니라 천문도를 작성하고, 펌프의 원리를 이용한 항흡기(缸吸器), 짐을 실어 나르는 목우(木牛), 잔을 가득 채우면 저절로 새나가는 이른 바 과유불급(過猶不及)을 깨우치게 하는 계영배(戒盈盃), 저절로 시간을 알리는 자명종(自鳴鐘) 등을 제작했고, 수차(水車)나 자승차(自升車)의 발명과 활용을 주장하였다. 다시 말하면 하백원은 선진 과학문물을 받아들여 실생활에 활용될 수 있는 기계를 고안하거나 제작함으로써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실천하는 측면에 깊은 관심을 보인 실학자다.

하백원의 자는 치행(穉行), 호는 규남(圭南)인데, 규남이라는 호는 서석산(瑞石山) 규봉(圭峰)의 남쪽에 살았다 해서 지어졌다. 1781년 1월 유풍의 고을 복천(福川: 동복현)의 야사촌(野沙村: 현재의 전남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에서 아버지 진성(鎭星)과 어머니 장택 고씨 사이에서 2남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주돈이, 장재, 정호, 주희의 책을 다 읽었으며 시문에 능했고, 15-16세에는 문사(文詞)로써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송시열의 문인인 송환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03년 23세에는 주변 인물들의 권유로 과거시험을 치러 진사 시험에 합격한 후 가정 사정으로 인해 출사하지 않았고, 50세가 넘어서야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하백원이 실학자로써 자리매김 할 수 있었던 이 30년간의 시간은 다양한 서적을 섭렵하고 특히 과학기술에 관심을 많이 가졌던 시기였다.

하백원의 실학

하백원의 학풍은 사상의 발달이 원숙하고 사유의 심도가 깊어 사리(事理)에 대한 시비곡직(是非曲直)을 판단하는 능력이 뛰어난 점이 남명학파의 맥을 이은 듯 하고, 평소 실천중시 정신을 바탕으로 농업 이외에도 상업이나 수공업과 같은 말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농공상고(農工商賈)가 모두다 학문이므로 선비가 농사에 나서 토지를 키우면 우리 뛰어난 선비의 시를 훈훈하게 하며, 공장(工匠)의 일에도 지극한 이치가 있다고 말해 그의 실학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말업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16세기 화담학파를 대표하는 학자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의 상·공업 중시론과도 유사성을 갖는다. 이런 점은 하백원의 사상이 화담학파의 실용 사상이나 실학파 중에서 청나라에 들어가 그 문화를 직접보고 문물을 수입하자고 주장한 북학파의 북학사상을 내재적으로 계승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 규남집에 수록된 자승차 도해도

자승차(自升車)를 설계하고 만국전도와 조선전도를 제작하다

17세기 무렵 서양의 선교사들이 중국으로 들어가 선교활동을 하면서 제작 간행한 서학서(西學書)와 세계지도들이 대체로 사신들을 통해 조선으로 유입되었는데 하백원은 이렇게 유입된 서구의 기술서와 지식서의 메뉴얼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이용후생적인 사고를 지니고 그 실천에 주력한 하백원의 사상은 자승차(오늘날의 양수기(揚水機))와 지도의 제작이라는 구체적인 행위로 나타났다. 단순히 중국을 통해 들어온 문물을 모방에 그치지 않고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고찰하고 활용하는 방안을 강구하였기에 훗날까지 풍부한 식견과 박학함을 지닌 학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백원은 일찍이 『농정전서(農政全書)』, 『천공개물(天公開物)』, 『삼재도회(三才圖會)』 등의 문헌을 통해 수차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얻게 되었는데 중국 문헌을 통해 알게 된 수차에 대한 하백원의 태도는 이전의 호남 학자들이 중국의 문헌에 나오는 수차들을 그대로 제작하여 보급, 활용하자는 태도를 지녔던 데 반해 하백원은 비판적 수용의 입장이 약간의 차이를 갖게 한다.

1810년 하백원은 중국 문헌에 소개되어 있는 수차들을 고찰해 본 결과 직접적인 활용법이 우리의 실정에 맞지 않다고 판단하여 본인이 직접 자승차의 구조도인 자승차도해(自升車圖解)를 고안했다.

자승차의 구성과 원리를 보면 다음과 같다.

크게 방통(方筒)과 수륜(水輪), 가(架)로 구성되었고 이하 구조로 각각 방통에 다섯 가지, 수륜에 세 가지, 가에 두 가지가 설치된다. 좀 더 자세히 들어가 보면, 첫 번째 방통에는 시냇물을 끌어오는 전후통(前後筒), 고인물을 위로 퍼 올리는 후통(後筒), 앞뒤를 격리시키는 격판(隔板), 물길을 개폐(開閉)하여 들어오는 물이 나가지 않는 구조의 설(舌), 앞의 통에서 물을 흡입하여 뒤의 통으로 몰아가는 수저(水杵) 이렇게 다섯 가지가 구성 되어 있다.

두 번째 수륜에 속하는 세 가지를 설치하는데, 그 중 축은 수삽(水箑)과 쌍륜(雙輪)을 설치하고, 수삽은 물을 격동시켜 스스로 돌게 하는 힘을 일으키는 것이며, 쌍륜은 수저를 오르내리게 하는 것이다.

세 번째 가에 속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 통가(筒架)는 방통과 수륜을 설치하는 것이고, 둘은 언조(偃槽)는 흐르는 물을 끌어당겨 수삽을 격동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에 따른 치수 단위는 척(尺), 촌(寸), 푼(分), 리(厘)이고 이것은 하백원의 세대를 감안하면 영조척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하는 연구보고서가 있다.

좀 더 자세히 서술하자면 한 지면을 다 차지하고도 모자랄 듯 싶다.

▲ 규남문집

수차의 설계도가 그의 문집인 『규남문집(圭南文集)』에 정교하게 도설로 그려져 전해지고 있지만 기록에 의하면 자승차를 직접 시험해 보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옛 부터 농경사회에서 치수사업을 가장 크게 생각하며 가뭄에 민생안정에 주력으로 삼았는데 하백원도 화순 지역 사회에서 이러한 노력을 끊임없이 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하백원은 지도 제작에도 열정을 보였다. 1811년에 제작한 《동국지도(東國地圖)》는 기하학적인 지식을 토대로 백리척이라는 축척법과 같은 척도법을 사용해서 새로운 지도 제작법을 활용해서 만든 지도이다.

《동국지도》는 19세기를 대표하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보다 50년이 앞선 우리나라 지도로 총 9폭으로 되어 있는데, 첫 장은 《조선전도(朝鮮全圖)》이고, 나머지 여덟 장은 팔도의 지도를 따로 그린 것이다. 이 지도에는 산천과 도로망 등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고 이러한 제작법은 하백원이 당시의 지도와 지리에 대해 박식하였음을 보여준다.

하백원이 세계지도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18-19세기동안 공식적이든 비공식 적으로 조선으로 유입된 서구식 세계지도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모사하여 학문적 강구의 대상으로 삼았던 시대이기도 했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과 함께 탐구영역 흐름을 탄 것으로 추측된다.

▲ 만국전도

1821년에 제작한 《만국전도(萬國全圖)》는 적도를 중심으로 한 북반구와 남반구의 세계 각 나라들을 지금과 비슷한 모습으로 그려놓은 서구식 세계지도로 이탈리아 줄리오 알레니(Giulio Aleni)의 《천하도지도(天下都地圖)》를 모티브로 제작되었다.

지도의 하단에는 자세한 주기(註記)를 달아 지도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지도제작은 농포(農圃) 정상기(鄭尙驥)의 동국지도가 그 처음이기는 하지만, 이 세계지도는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하백원이 그렸다. 

하백원이 세계지도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18-19세기동안 공식적이든 비공식 적으로 조선으로 유입된 서구식 세계지도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모사하여 학문적 강구의 대상으로 삼았던 시대이기도 했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과 함께 탐구영역의 흐름을 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노력들은 이 시기에 조선의 개방적인 세계를 지향해 나아가는 동향을 볼 수 있다.

하백원 실학의 역사적 의의

이렇듯 과학기술을 이용한 편의시설 설비, 지도 제작과 천문학에 대한 관심 등에 대한 사고는 하백원이 18세기 북학사상의 수용이라는 시대적인 흐름 속에서 형성된 실학정신이었음이 분명하지만 또한 가학(家學)의 영향도 있었다. 그의 7대조 하윤구(河潤九)와 친교가 두터웠던 정두원(鄭斗源)이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가서 이듬해 귀국할 때 홍이포(紅夷砲)·천리경(千里鏡)·자명종(自鳴鍾) 등 서양기계와 《천문서》, 《직방외기(職方外記)》, 《서양풍속기(西洋風俗記)》 등 서적을 가지고 왔다. 증조인 하영청(河永淸)과 친교가 깊었던 신경준, 황윤석, 홍대용 등은 조선의 언어, 지리, 역사, 풍속에 대한 학문적 연구와 함께 당시 청나라를 통해 유입된 서양의 과학기술의 영향을 받은 수학과 천문학 연구에서 뛰어난 업적을 보인 학자였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그가 선대로부터 전승받은 가학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거니와, 하백원이 실학 연구에서 남긴 업적 또한 그러한 가학의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가문의 영향을 받아 단순히 본인의 진리추구를 위한 이론만을 중시하거나 실용만을 강조하지 않고 이 모두를 중요시 여겼다. 그의 실학사상이 18세기 북학사상의 수용과 발전이라는 기반 속에서 형성되었음을 고려하면, 그가 19세기 호남 지역이 실학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하백원의 이론과 실용적인 측면을 모두 강조하는 학문관은 현대 경영학에도 대입 시켜 봐도 그 맥락이 유사하다는 연구도 있다.

지금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규남 하백원의 많은 자료들을 전시 중이라는 반가운 소식이 있다. 전시는 규남 후손이 소장했던 문헌 기탁에 따라 이뤄졌고, 기탁은 소장품 소유권이 넘어가는 기증과 달리 소유권은 그대로 두되 수집 정리 보관 전시를 도서관에 맡기고 기간을 연장하는 방식으로 한다는 소식이 있다.

우리 호남지방문헌연구소에도 많은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고, 또 그 자료들을 가지고 각 분야별로 연구 중에 있지만 보다 가치 있는 문헌들이 기증·기탁되어지고 아직 숨어있는 훌륭한 호남 인물들이 들어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