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기록문화유산(21) - 임형수(林亨秀)
호남기록문화유산(21) - 임형수(林亨秀)
  • 문희숙 호남지방문헌연구소 연구원
  • 승인 2016.06.16 14:1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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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士禍)와 당쟁으로 얼룩진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살다

엇그제 버힌 솔이 낙낙장송 아니런가

작은 듯 두었던들 동량재 되리러니

어즈버 명당에 기울면 어느 남기 버티랴.

 

‘엊그제 벤 솔이 낙락장송(落落長松) 아니던가. 잠시만 두었던들 동량재(棟梁材) 되겠더니. 아! 명당(明堂)이 기울면 어느 나무로 버티겠느냐.’

이는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가 명종 2년(1547) 정미사화 때 일명 '벽서(壁書)의 옥(獄)'에 연루되어 목숨을 잃은 벗 임형수(林亨秀)를 낙락장송에 빗대어 읊은 시조이다.하서는 인재의 죽음을 슬퍼하여 나라의 일을 걱정하고 후일 나라의 일을 누가 맡아 할 것인 개탄하며 이 시조를 지었는데 벗에 대한 만가(輓歌)이기도 하다..

호남지역의 사림파 중 한 사람이었던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 1514~1547)는 16세기 중종과 명종에 이르는 기간 동안 외척과 권신들의 권력다툼으로 발생한 정미사화에 휩쓸려 산화한 비운의 인물이다. 그는 횡포한 정치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34세의 나이로 억울한 죽음을 당하던 순간에도 호연한 기상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임형수의 자(字)는 사수(士遂), 호(號)는 금호(錦湖), 본관은 평택(平澤)이며, 전라남도 나주 출생으로 북병사(北兵使)를 지낸 임준(林畯)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기상이 호방하여 범상치 않았는데 18세(1531)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22세(1535)에 대과에 급제한 후 예문관 교열(藝文館檢閱)과 시강원 설서(侍講院設書)를 역임했다.

그는 문무를 겸비하였고 풍채가 준수하였으며 기개 또한 매우 높아서 큰 인재라 불리었다. 1537년 9월에 중종이 서쪽 교외에 행차하여 농사일을 시찰하고 망원정(望遠亭)에서 입시한 문신들에게 ‘동정모추(洞庭暮秋)’라는 제목으로 칠언율시 한편을 짓게 했는데, 이때에 병조판서였던 소세양이 1위를 차지하였고, 주서(注書)였던 임형수가 2위를 차지해 아마(兒馬) 1필을 하사 받아 그 문예를 드날리기도 하였다. 또 인종(仁宗)이 동궁(東宮)에 있을 때에 요속(僚屬)들을 정밀하게 뽑았는데, 이 때 그는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로서 인종의 극진한 대우를 받았으며, 소세양의 추천을 받아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26세(1539)에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고 원접사 소세양의 종사관으로 차출되어 중국사신 화찰(華察)과 설정총(薛廷寵)을 맞이하러 가기도 하였다.

1545년 명종이 즉위한 뒤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 외척간의 다툼이 일자 소윤(小尹)에 의하여 대윤(大尹) 일파가 숙청되었는데, 임형수도 소윤의 영수 윤원형(尹元衡)의 미움을 받아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좌천되었다가 파직되어 나주로 귀향하였다.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정미사화 때 대윤 일파로 무고하게 말려들어 절도안치(絶島安置)된 뒤 사사(賜死)되었다.

▲ 광주광역시 광산구 등임동 내등마을에 있는 사당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 임형수(林亨秀 1514~1547)를 주벽으로 임식(林植 1539~1589), 임회(林檜 ?~1624)를 제향하고 있다.

선조 즉위년인 1567년에 신원(伸寃)되었고, 1702년 나주의 송재서원(松齋書院)에 배향되었으며, 1796년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묘는 나주의 흥룡동(興龍洞) 선영의 곁에 있고, 광주광역시 광산구 등임동 내동마을에는 그를 기리는 사우 등림사(登臨社)가 세워져 있다

젊은 날에 생을 등지다보니 그의 절친한 벗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과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와 같이 많은 문학적 작품을 남기지 못한 것이 안타까운 일이지만, 다행히 그가 남긴 일부 작품과 임종 시 관련된 일화들, 그리고 제가(諸家)의 평과 교유 인물관계 등을 통해 그의 행적을 알 수 있다. 그 자료들은 김수항(金壽恒 1629~1653)의 묘갈명, 『금호유고(金湖遺稿)』 속의 「행적기략(行蹟紀略)」, 이중열(李中悅 1518~1547)의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속의 「임형수전」, 이정성(李廷聲 1549~1607)의 『동각잡기(東閣雜記)』, 윤근수(尹根壽 1537~1616)의 『월정만필(月汀漫筆)』, 허균(許筠 1569~1618)의 『성수시화(惺叟詩話)』, 조선왕조실록 등이 있다.

그의 문집 『금호유고(錦湖遺稿)』 속에는 대범하면서 소소한 것에 매이지 않는 장부다운 기질과 호일(豪逸)한 풍류가 돋보이는 작품들이 실려 있다. 특히 회령판관(會寧判官) 때 변방의 오랑캐를 잘 어루만져 그들의 환심을 얻었는데 당시 변방의 풍물과 작자의 호기가 주제로 잘 드러나 있는 가사(歌辭) 「오산가(鰲山歌)」와 회령판관으로 부임해 가면서 지은 시 「즉사(卽事)」는 제현들의 호평을 받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우연히 발견된 벽서

‘女主執政于上, 奸臣李芑等弄權於下, 國之將亡, 可立而待。豈不寒心哉?’

‘여왕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이는 1547년 9월 양재역에 붙은 익명의 벽서의 내용이다. 이 벽서를 발견한 부제학인 정언각(鄭彦慤)이 범인은 잡지 못하고 이를 이기·정순명(鄭順明)에게 알리고 문정왕후에게 고하니 조정에서 윤원형과 그 무리들은 을사잔당의 소행이라 주장하며 을사사화 때 의심만 받고 죽이지 않은 사람을 다시 죽이거나 귀양을 보내어 일시에 어진 선비들이 화를 당하였다. 이 사건이 일명 ‘양재역 벽서사건’이며 ‘정미사화’라 부르기도 한다.

중종의 뒤를 이은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병으로 죽고 경원대군이 즉위하자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간신(奸臣) 윤원형(尹元衡)의 무리가 정권을 쥐고서 역모를 씌워 대윤을 중심으로 한 반대 세력을 숙청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을사사화로, 그 과정에서 사림(士林)계열의 인물들까지도 많이 희생되었다. 이러한 대대적인 정치공세 속에 정미년에 이르러 자신들에 대한 정적으로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잔존 인물들을 도태시키려는 의도로 정언각이 괴벽서(怪壁書)를 올려 옥사(獄事)를 일으켰다. 이로 인해 한때의 이름 있는 선비들이 죽거나 유배를 떠나는 등 그들의 계략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을 정도였다. 이 기회를 틈타 평소에 임형수의 강직한 점을 시기(猜忌) 질투하던 정언각은 진복창과 함께 합세하여 윤원형에게 빌붙어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려고 갖은 모략질을 하였다. 처음에는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라는 명이 내려졌으나, 정언각이 임형수는 윤임과 한마을에 살고 그의 심복이라 주장하며 술수를 부려 가죄(加罪)하기를 청하니 특명으로 사사(賜死)하라는 명이 내려진 것이다.

이후 소윤 일파가 몰락함으로써 유배되었던 인물들이 다시 요직에 등용되었다. 선조가 즉위하고 사림 세력이 중앙 정계를 장악한 뒤로는 벽서사건 자체가 무고로 공인되고, 연루된 인물들에 대한 신원과 관직회복이 여러 단계에 걸쳐 행해졌다. 이 사건은 익명으로 쓰여진 것을 문제 삼았다는 절차상의 잘못이 많이 지적되기도 하였다.

▲ 광주광역시 광산구 등임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이다. 정자 안에는 임형수의 《금호문집》 목판각이 보관되어 있고, 한말의 학자이자 의병장인 기우만(奇宇滿 1846~1916)의 기문이 있다.

 

- 목침을 교수형에 처하다 [木枕絞首] -

사사(賜死)될 때 일을 송시열(宋時烈)의 송자대전(宋子大全) 제75권 서(書)에서 이렇게 전한다.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는 사약을 받을 때에 형관(刑官)에게 청하기를, “조정에서 자진(自盡)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반드시 약을 마시고 죽어야만 자진이 되는 것은 아니니, 목을 매어 죽게 할 수도 있겠느냐”고 하자, 형관이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드디어 방에 들어가서 벽에다 구멍을 뚫고 나졸(羅卒)에게 밖에서 목맨 끈을 당기라 하였다. 이윽고 나졸이 죽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방에 들어가 보니 벽 구멍에는 목침 하나가 붙어있을 뿐이고 금호는 방 한구석에 누워서 손으로 자기 엉덩이를 치고 웃으면서, “평생에 해학을 좋아했으므로 오늘 마지막으로 해 본 것이다.”하고, 마침내 목을 매어 죽었으니 이는 단정한 선비의 할 일은 아니나 역시 금호공의 호탕한 기개를 볼 수 있었다.’

[錦湖臨命時。請於刑官曰。朝廷賜以自盡。不必仰藥。寧許就經也。刑官聽之。遂入室穿壁。使羅卒自外引之。旣而。羅卒入見。則一枕貼壁。而錦湖偃臥於一隅。拊髀而笑曰。平生善謔。今日欲終竟矣。遂就經。此雖非莊士家法。而亦可見公之豪爽氣槩矣]

임종시 또 다른 일화를 들자면, 제주 목사로 있다 파직당하고 귀향하여 나주(羅州)의 본집에 거처하고 있다가 사사의 명을 받았는데 나주에 온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게 집에 들어가 두 부모에게 하직 인사를 올릴 수 있도록 허락을 받고 태연히 안뜰에 들어가 부모에게 두 번 절하고 나왔다. 그리고 채 열 살도 안 된 어린 아들을 불러다가 뒷일을 잘 처리하도록 타일렀는데 말씨가 부드럽고 느긋하여 마치 아무 일도 없는 평일(平日)과 같은 모습이었다. 이윽고 의미심장한 유언을 남기며 경계하기를, "절대로 글을 배우지 말아라" 아들이 돌아서자, 다시 불러 말하기를 "만일 글을 배우지 않으면 무식한 사람이 될 터이니, 글은 배우되 과거 시험에는 응시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라고 하고 독주를 받아 들고 크게 웃으며, “이 술은 잔을 주고받는 법이 없다.” 라고 하니, 종 한 사람이 울면서 안주를 가져왔다. 공이 물리치면서, “향도(香徒)들이 벌을 쓸 때에도 안주는 안 쓰는 법인데, 이게 어떤 술이라고….” 하고서, 사약을 끌어다가 쭉 들이켜 마셔버렸다. 그러나 평소 주량이 한정이 없었던 그는 사약이 든 독주를 열여섯 사발이나 마셨는데도 까딱도 하지 않았다. 다시 두 사발을 더 마시게 했는데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자 마침내는 목을 졸라 죽였다고 전한다.

이렇듯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도 초연한 자세로 여유를 보이며 목침을 교수형에 처해 희롱했다는 일화는 사극을 통해서나 또는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양반편에서 해학적으로 묘사된 유명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 일화로 인해 목침을 교수형에 처했다는 목침교수(木枕絞首)의 성어가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 척당불기(倜儻不羈) 기남자(奇男子) -

『금호유고』 중에 「제가잡기(諸家雜記)」는 이정형(李廷馨)이 지은 『동각잡기(東閣雜記)』와 허균(許筠)의 『성수시화』 가운데 임형수에 대한 기록만을 뽑아 엮은 것인데 “임금호는 모든 사람들을 우습게보아서 아무리 선배라도 말을 함부로 했다. 그러나 퇴계에 대해서만은 깍듯이 존경하고 함부로 하지 않았다.” 라고 하였고, 퇴계도 금호를 ‘기남자’라 평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절친인 퇴계와 호당에 함께 있을 당시, 술에 취하여 노래를 부르며 시를 짓고 퇴계의 자를 부르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남자의 기이하고 장대한 일을 아는가? 나는 알고 있노라.” 하자 퇴계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말을 해보라” 하니 임형수가 사나이의 호쾌한 취미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다.

“큰 눈이 산에 가득히 쌓일 때 검은 담비가죽 옷을 입고 허리에는 흰 깃이 달린 긴 화살을 차고, 어깨에는 백 근의 각궁을 매고 철총마를 타고 채찍을 휘두르며 골짜기로 달려 들어가면, 큰 바람이 골짜기에서 일어나고 만 그루의 나무가 진동하지요. 그런데, 느닷없이 큰 멧돼지가 놀라 일어나서 길을 잃고 달아나면 재빠르게 화살을 빼어 힘껏 잡아당겨 쏘아 맞히고는 말에서 내려 칼을 뽑아 그 돼지를 죽인 다음, 늙은 상수리나무를 쪼개어 불을 피워 놓고 긴 꼬챙이로 그 고기를 꿰어서 구우면 기름과 피가 뚝뚝 떨어집니다. 이때 호상(걸상)에 걸터앉아 고기를 저며서 먹으며 큼직한 은 대접에 술을 가득히 부어 시원하게 마시면서 얼큰히 취할 때쯤 우러러 하늘을 보면, 골짜기의 구름이 눈이 되고 조각조각 솜이 되어 날아 취한 얼굴에 달라붙게 됩니다. 이런 재미를 그대가 어찌 알겠습니까? 그대가 능한 것은 다만 글이나 짓고 글씨 쓰는 한낱 작은 기능입니다.” 하고 무릎을 치며 크게 웃었다 한다.

이황은 임형수의 인품을 말할 때면 언제나 그가 하던 말을 되뇌이며 “그 기상의 호탕함을 지금도 상상하겠다”라 했다.

퇴계(退溪)는 비록 임형수와 취향은 달랐지만 그를 인정하였고 우의가 깊었으며, 매양 ‘기남자(奇男子)’라고 칭찬하였다. 만년(晩年)에 이르러 호탕한 그를 그리워하여 말하기를, “어찌하면 임사수(林士遂)와 더불어 서로 대면할 수 있으랴." 하고 그의 억울한 죽음을 원통해 했다고 한다.

나주 출신 임형수는 그 사람됨이 활달하고 준수(俊秀)하여 풍의(風儀)가 멋지고, 기개(氣槪)를 숭상하였으며, 소탈하고 호탕하여 자잘한 관습이나 예절에 구애받지 않았으니, 그 높고 뛰어난 행동과 기발한 식견은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유학자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것이었다. 목숨을 끊을 무렵 한 가지 절조(節操)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일찌기 사한(詞翰)으로써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궁마(弓馬)에도 솜씨가 있어서 그 재능이 눈에 띄게 드러났고, 어떤 일을 시험하더라도 적절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국기(國器)라 추중(推重)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사림(士林)의 화(禍) 중 가장 극도에 달했던 을사사화(乙巳士禍)에 희생되었던 제현(諸賢) 중에서 오직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가 당한 화가 가장 심하였다. 그에게는 기이한 재주에 걸맞는 성대한 명성이 있었고, 참신하고 비범한 담론(談論)에 해학(諧謔)까지 뛰어났으며, 간사한 자를 배척하는 일에는 조금도 망설이거나 꺼리는 바가 없었기에 뭇 간사한 자들로부터 시기와 원망을 산 것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이처럼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얽매이지 않는 호탕함에 가슴이 탁 트이면서 나라의 큰 동량을 알아보지 못한 시대의 암울함에 가슴이 먹먹할 때가 많고, 한편으로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느낄 수가 있다.

마지막으로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 임형수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지은 묘갈명 속의 기록을 적어본다.

‘아! 하늘은 이미 공에게 탁절(卓絶)하고 기이한 재능을 주어놓고서는 도리어 또 저런 귀신 물여우같은 못된 자들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여 그들이 멋대로 죽이게 하고 세상에 쓰임을 끝까지 못하게 하였으니, 아! 정말 얄궂은 노릇이다. 저 못된 자들은 누구이길래 어진 사람을 죽이고도 후련하게 여겼을까? 그들의 묘를 지날 때면 더러운 냄새에 침을 뱉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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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태희 2021-12-20 11:54:03
사진과 설명이 바뀌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