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멋을 찾아서(7) 부채공예 김명균
남도의 멋을 찾아서(7) 부채공예 김명균
  • 유현주 수습기자
  • 승인 2016.06.02 01: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부채에 100년 철학을 담다”

본격적으로 더위가 시작된다는 단오. 단오가 되면 임금은 대나무가 많이 나는 영·호남에서 진상한 부채를 신하들에게 나누어주었고, 또 신하들은 왕에게 하사받은 부채를 가족, 이웃들과 나누며 함께 무더위를 이겨내곤 했다.

예로부터 민화, 풍속화 등에서도 자주 등장하며 한때는 무더위 하면 가장 먼저 떠올랐던 부채. 옛 선조들에게 있어 부채는 한여름 무더위를 쫓아주는 영특한 물건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그림과 시를 담은 하나의 예술작품이기도 했다.

하지만 문명의 발달로 선풍기와 에어컨이 안방을 차지하면서 부채는 점점 설자리를 잃어갔다. 때로는 주위에서 에어컨이나 선풍기가 있는데 부채를 찾는 사람이 있나?”라는 물음을 던지기도 한다. 하지만 부채를 만들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꿋꿋하게 부채를 만드고 있는 공예가 김명균 씨. 그를 만나 남도의 멋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 30년간 부채를 만들어온 공예가 김명균 씨
제가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가 부채를 만들었어요. 우리 형제가 8형제인데 큰 형님과 둘째 형님은 아버지를 따라 부채를 만들고 있었죠. 저는 대기업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휴가를 나와 고향집에 갔더니 아버지가 네가 부채를 해봐라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 시절만 해도 아버지가 해라하면 자식들은 무조건 따르던 시대였어요. 그래서 저도 . 회사 그만두고 와서 할랍니다.’라고 대답했죠. 그렇게 부채 만드는 것을 시작하게 됐어요

아버지의 권유로 부채를 만들기 시작한지 어언 30. 그의 아버지는 오로지 태극선과 같은 단선만 제작했다. 하지만 접었다 폈다 하는 합죽선을 만들어야 부가가치가 상승할 것이란 생각이든 김명균 씨는 전주의 합죽선 장인인 이완생 선생을 찾아갔다. 이완생 씨의 집에서 기거하며 가르침을 받기를 3. 김 씨는 단선에 합죽선까지 동시에 만들 수 있는 공예가가 되었다.

제가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단선 만드는 것을 보고 자라서, 저절로 단선은 만들 수 있었어요. 그런데 거기에 합죽선 만드는 것 까지 배웠으니 단선과 접선을 동시에 하게 된 것이죠. 사실 이렇게 단선과 접선을 같이 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대부분 단선이면 단선, 접선이면 접선만 만들죠. 단선과 접선을 동시에 하기 때문에 고객들도 종류가 다양하다며 좋아해요. 어릴 적 배운 것과 전주에서 배운 것 모두가 제 인생에서 정말로 큰 도움이 되었죠

▲ 뱀 가죽을 소재로 여러 번 옻칠을 해 완성시킨 부채. 옛 선조들은 동물 가죽이나 깃털 등 다양한 소재로 부채를 만들었다.
부채를 만드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재료가 되는 대나무와 한지다. 예전에는 대밭에서 대를 전문적으로 베는 사람, 베어진 대나무를 중간에서 가공하는 사람이 있어 재료를 손쉽게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직접 대밭에 나와 대를 베어야 한다. 부채의 기본 재료를 구하는 것부터가 녹록치 않다.

저와 형제들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따라 대나무를 베고 이런 일들을 해왔으니까 쉽게 할 수가 있어요. 하지만 새로 부채를 만들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대나무를 베고 그러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만약에 제가 부채 만들기를 이제 막 시작했는데 가서 대나무를 베 와라그러면 정말 못할 것 같아요. 참 어려운 일이죠

게다가 부채의 뼈대가 되는 대나무를 구하고 나면 한지를 구해야 하는데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한지의 수요가 점점 줄어들면서 한지 공장들이 줄줄이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지역별로 한지공장이 몇 군데씩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한지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곳이 얼마 남아있지 않다.

 옛날에는 광주에도 한지공장이 있고 전주에도 많았어요. 그런데 요즘은 한지공장이 많이 없어졌어요. 그나마 다행이도 전주에 한지를 하는 곳이 한 군데 있어서 원하는 종이를 부탁해서 만들고 있어요

부채의 기본 재료는 대나무와 한지다. 하지만 꼭 부채를 대나무와 한지로만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종이를 구하기 어려웠던 옛날, 선조들은 동물 가죽이나 깃털 등으로 부채를 만들었다. 김명균 씨 또한 동물 가죽이나 깃털 등의 재료를 구하게 되면 이러한 옛날 그대로의 부채를 재현해보곤 한다.

▲ 남농 허건 선생의 아버지인 미산(米山) 허형 선생의 그림으로 만든 부채. 이처럼 김명균 씨는 다양하고 색다른 시도를 통해 부채에 예술성을 한껏 더하고 있다.
아울러 김 씨는 그의 부채에 광주에서 활동 중인 작가들의 그림을 담기도 한다. 활짝 펼쳐진 부채를 화폭 삼아 광주의 상징인 무등산 입석대의 모습을 담기도 하고, 부채의 하얀 바탕에 예쁜 꽃이나 나무를 그려 넣기도 한다.

그의 새로운 시도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김명균 씨는 베개의 자수를 떼서 부채를 만들거나 남농 허건 선생의 아버지인 미산(米山) 허형 선생의 그림을 구해 부채로 만드는 등 다양하고 색다른 시도를 통해 부채에 예술성을 한껏 더하고 있다.

옛날엔 더위를 피하기 위해 쓰던 부채다. 하지만 선풍기나 에어컨 등이 등장하면서 부채는 장식, 소품 등으로 탈바꿈했다. 특히 요즘 사람들이 많이 찾는 것은 체험용부채다. 부채에 아이들이 색칠할 수 있도록 밑그림을 그리거나, 대나무와 한지로 아이들이 부채를 만들 수 있도록 재료를 가공해 판매하는 것이다.

또한 집이나 가게를 장식하는 장식용 부채를 찾는 사람도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그래서 김씨는 최근 수요가 계속 증가하고 있는 체험용 부채를 위주로 꾸준히 개발하고 있다.

▲ 그가 여태껏 만들어 온 작품 하나, 하나가 모두 소중하지만 그 중 더욱이 마음에 드는 것은 보관한다. 이렇게 모아진 부채가 벌써 3천 여 점이다. 이렇게 모은 작품은 팔지 않고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김명균 씨의 부채 인생 30. 그 동안 그가 만든 부채는 수십 만 점에 이른다.

자기 작품인데 애착 가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어요라며 웃는 김명균 씨. 그가 여태껏 만들어 온 작품 하나, 하나가 모두 소중하지만 그 중 더욱이 마음에 드는 것은 보관한다. 이렇게 모아진 부채가 벌써 3천 여 점이다. 이렇게 모은 작품은 팔지 않고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다. 바로 그의 아버지가 살아계실 적, 아버지께 선물했던 부채다. 본인의 작품이면서도 아버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에 김명균 씨는 그 부채를 정말로 소중히 여기고 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제가 아버지에게 선물했던 부채가 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사용하셨고, 또 아버지의 흔적이 남겨져 있기 때문에 제가 정말로 아끼고 있죠. 제게 정말 소중한 부채이기 때문에 소장고에 잘 보관해두고 있어요

남도의 멋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냐고 묻자 김 씨는 자연스레 예술을 즐기는 남도 사람들의 모습이야 말로 남도의 멋이라고 답한다. 처음 스승에게 합죽선을 배울 당시, 김 씨가 제가 나가서 어디에 터를 잡는 것이 좋겠습니까?’라고 묻자 스승은 거리낌 없이 광주로 가라고 말했다. 광주를 무대로 활동하는 예술 작가가 많았기 때문이다. 스승은 광주에 가면 한 사람 정도는 부채 일로 먹고 살 수 있다고 했다고 한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뒤 전주를 떠나 광주로 오니 스승의 말대로 작가들도 많고, 그들을 상대로 하는 화랑과 필방도 많았다. 게다가 식당을 가도, 가정집에도 어딜 가나 그림 한 점 씩은 꼭 걸려 있었다. 예술을 향유하는 광주 사람들의 모습에서 김명균 씨는 남도의 멋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남도의 멋이 가득한 광주에 정착할 당시 광주에는 아는 작가도, 부채를 판매할 판로도 없었기에 김명균 씨는 굉장히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기반을 닦는데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10년이 지나니 현상유지가 되기 시작했다. 20년이 되니 자동으로 돈이 따라왔다. 이 때, 김 씨는 최소한 한 분야 20년 이상 종사해야 하는구나라는 사실을 느꼈다. 지금도 그는 공예 후배들에게 공예를 시작하고 나서 최소 10년은 눈물 밥을 먹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 김 씨는 그의 부채에 광주에서 활동 중인 작가들의 그림을 담기도 한다. 활짝 펼쳐진 부채를 화폭 삼아 광주의 상징인 무등산 입석대의 모습을 담기도 하고, 부채의 하얀 바탕에 예쁜 꽃이나 나무를 그려 넣기도 한다.
판로가 없던 초창기엔 부채를 길거리에 놓고 팔기도 하고, 공원 등지에서 좌판을 펼치기도 했다. 직접 발로 이곳저곳 뛰어다니며 판로를 개척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 덕에 거래처가 하나 둘 씩 늘기 시작했다. ‘요즘도 부채를 찾는 사람이 있냐는 주위의 우려는 아랑곳하지 않듯 거래처는 지금도 하나 둘 씩 늘고 있다고한다.

주변에서 요즘 에어컨이나 선풍기가 있는데 부채를 찾는 사람이 있냐며 물어보곤 해요. 하지만 부채는 다른 공예품에 비해 수요가 많은 편이죠. 지금도 점점 거래처가 많아지고 있어요. 앞으로도 늘어나면 늘어나지 줄어들지는 않을 거예요. 부채는 늘 간편하게 들고 다닐 수 있잖아요. 그러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도 많은 사람들이 여름이 되면 부채를 찾죠

특히 요즘엔 환경을 보호하려는 움직임이 늘면서 부채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게다가 지난해에 비해 올해 날씨가 갑자기 더워진 탓에 사람들이 좀 더 이른시기에 부채를 찾기 시작했죠. 보통 단오절 지나야 더워지는데 절기가 한 달은 빨라진 것 같아요. 부채하는 사람 입장에선 늦더위보단 일찍 더운 것이 좋죠

아버지의 뒤를 따라 30년 간 부채를 만들어온 김명균 씨. 최근 그에게는 소박한 꿈이 두 가지 있다. 첫 번째는 부채박물관을 건립하는 것, 두 번째로는 아들에게 가업을 물려주는 것이다.

아들이 하나 있는데 예전엔 아들에게 부채를 만들어보라고 말도 못 꺼냈어요. 괜히 애 공부 안한다고 아내에게 핀잔을 듣기 일쑤였죠. 하지만 이젠 안정적으로 기반을 닦아서인지 아들에게 이것을 물려주고 싶다고 말해도 아내가 반대를 하지 않아요. 그래서 요즘은 아들에게 네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꿈을 펼치다가 안 되면 언제든 와라. 이 일을 물려주겠다라고 말하곤 해요. 제가 기반을 닦아놨으니 아들은 저보다는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겠죠

사람들은 보통 부채를 더울 때 더위를 쫓는 물건 정도로 단순하게 생각하고 만다. 하지만 부채는 회화, 조각, 디자인이 합쳐진 종합예술품이다. 이 때문인지 서양에서는 부채를 움직이는 미술관이라고 하기도 한다.

어렸을적엔 아버지가 수수께끼처럼 대나무랑 한지가 만나면 무엇이냐, 부채가 된다.’, ‘부채가 무얼 낳느냐, 바람을 낳는다.’, ‘부채가 어떻게 죽느냐 하면 찬바람이 들면 죽는다.’라는 말을 해도 이해를 잘 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나이 들어 생각해보니 저런 물음 하나, 하나에 부채에 대한 아버지의 철학이 담겨 있던 것이죠

부채에 대한 아버지의 철학을 이어받아 새로운 시도를 통해 그만의 철학을 완성해 나갔다. 또 이렇게 완성된 하나의 철학을 아들에게 물려주고자 하는 것이 꿈인 김명균 씨. 그의 아버지 대로부터 내려온 100년의 부채 철학은 세상 그 무엇보다도 귀중한 우리 고유의 멋이 아닐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