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 유팽로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 유팽로
  • 범지훤 호남의병연구소장
  • 승인 2016.05.26 00: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범지훤 호남의병연구소장

해마다 이 땅에 ‘3.15 哭 민주주의 장송데모’를 기점으로 붉은 ‘4월19일 민주혁명’이 지나고 ‘5월18일 광주민주화 운동’의 함성을 되새기노라면 신록 짙은 보훈의 6월을 맞이하면서 총체적으로 지난 역사를 돌아보게 된다.

누가 말했던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420여 년 전 임진왜란은 1592년 4월14일(양력5월24일)부터 1598년 11월10일까지 7년간 지속된 전쟁이었다. 전쟁초기 일본군은 9개 부대 15만 여 명을 투입하여 일직선으로 진격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당시 왜군은 부산포에 상륙한 후, 무인지경을 행군하듯 한양에 입성했다. 왜군이 불과18일에 도성에 도착할 때까지 관군의 저항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관군이 그렇게 허무하게 패한 이유는 당시 조선 정부 병적 상에는 군사가 있었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거의 빠져버리고 실제로는 군사가 없는 허설현상 때문이었다.

조선은 장기간 평화를 누려 변방의 소규모 전투는 의식했지만 국가단위 대규모 전투는 전혀 인식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개전 초기에 왜군에게 급습을 당했을 때 부산포에서 한양까지 왜군이 지나간 경상도 어디에도 무장된 정규군은 없었고, 이와 같은 현상은 전국 어느 곳에서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조선정부에서는 유비무환의 국방은커녕 군대에서 병사들이 놀고먹으며 쌀만 축낸다고 군대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농민 병을 정규 상비병으로 조직했지만 군역은 당시 화폐대신 포로 지불하는 관행이 행해졌고, 정기적인 훈련도 형식적 점검에 불과 했다. 심지어는 왕이 머무는 도성을 지킬 군사도 없을 정도로 방비에 허술했다.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성혼(成渾)의 시문집인 우계집(牛溪集)을 보면 임진왜란(4월 전쟁)이 발발한 직후에 성종과 중종의 능이 왜군에게 파헤쳐지고 유체가 불태워진 사건도 기록되어 있다. 당시에 임금과 대신들은 피신, 또는 도망을 갔고 평안도 사족들이 대거 강원도로 피난하는 바람에 길이 막힐 정도의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들이 떠난 자리를 창의(倡義)를 외친 민병조직이 나섰으니 바로 의병이었다. 관군이었든 의병이었든 간에 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급하게 훈련을 해가면서 점차 전투에도 익숙해져간 것이다. 반면에 일본은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부터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준비,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가 쇼군으로 군림하던 때에 일본의 총포숫자가 서양의 총포숫자를 넘어서면서 그들은 칼을 버리고 조총을 개인화기로 무장, 막강한 전투력을 갖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유학이 지방에까지 확대된 결과였다. 유학은 충과 효, 그리고 선비의 의리를 중시하는 도덕중심의 학문이다. 따라서 의와 충의 정신을 바탕으로 국가비상시에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덕목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의병에는 왕을 위해 창의한 근왕의병(救國義兵)과 향토의 빼앗긴 읍성을 탈환하고자 하는 향보의병(鄕保義兵)이 있다. 의병장이 의병을 모을 때 주동이 된 것은 자기의 노비나 인근의 백성이었다. 의병을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 일으켰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엄격히 말해 당시의 ‘의병정신’하고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당시에는 민족이란 실체는 있었지만 민족이란 개념은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민족을 단위로 한 정치적 인식행위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민족이라는 말은 근대에 만들어진 개념이다. 당시의 의병들은 오직 구국일념과 향토방위의 숭고한 의병정신으로 무장, 살신성인(殺身成仁)했던 것이다.

6월1일은 정부가 국무회의 의결로 지정한 ‘의병의 날’이다. 필자는 지난 해, 경남 의령에서 3일간 거행된 ‘의병의 날’을 지켜보면서 곽재우 의병장 동상 및 그의 휘하 참모진 동상, 의병 탑, 채혼(採魂) 행사 등을 보면서 큰 감명을 받은 기억이 있다.

필자가 의병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2012년 KBS 역사스페셜 ‘조선을 지켜 호남을 구하라’ 호남 최초의 유팽로 의병장을 보고 충격을 받은 때문이다. 이제까지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이 ‘의령의 곽재우 장군’인줄 알았는데 ‘곡성의 유팽로 의병장이 3일 먼저 시작했다’는 학자들의 검증 및 주장을 본 것이다.

임란의병을 최초로 일으킨 사람은 유팽로이다.

유팽로(1554, 명종 9∼1592, 선조 25)는 성균관 학유로서 1592년 4월20일 순창 대동산 앞뜰에서 최초로 창의한 의병장이다. 그는 담양에서 모인 의병발대식 때 고경명을 대장으로 우부장은 유팽로, 좌부장은 그의 이종형인 양대박, 종사관은 안영으로 지휘부를 편성, 6000호남연합의병을 조직하는 데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는 진사시에 합격하고,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옥과현에서 살았다. 그가 당시에 기호지방에 격문을 지어 돌렸는데, 그 격문이 『정기록(正氣錄)』에 실려 있다. 호남의병들은 처음에 근왕(勤王)을 목적으로 북상하려 하였으나, 일본군이 전주를 침입하려 하자 금산에서 적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유팽로는 한쪽 눈을 못 보는 시각 장애인이었고 풍채는 왜소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담력이 있었고, 의지가 굳었으며 말을 논리적으로 했다. 그의 학문적 성취는 잡저인 유가설(儒家設) · 병가설(兵家設) · 농가설(農家設) 등 세편에 나타나 있다. 유가설은 중국의 역대학자를 일일이 논평한 것으로 그의 해박한 지식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가 가장 존경하는 유자(儒者)는 제갈량과 도연명이라고 한다. 제갈량의 경우 사심이 없는 우국충정과 지행(知行, 앎과 실천)을 강조하고 있으며, 도연명의 경우 세상일에 연연하지 않는 자유로운 태도를 바탕으로 한 삶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병가설에서는 유자는 문(文)만이 아니라 무(武)를 겸비해야한다고 역설, 군사의 문제, 무기문제, 지형지물의 이용, 첩보활동의 중요성들을 다루고 있으며 농가설에서는 농사짓는 요체를 사실적으로 적고 있다.

그는 금산전투에 앞서, 적(왜군) 수만의 병력을 오합지졸인 아군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험한 요지에 분거(分據)하였다가 적이 교만하고 나태해지기를 기다려 공격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에서 전투에 임했다. 위급상황에서 일단 탈출했으나 그는 고경명이 아직도 적진 속에 있다는 말을 듣고 다시 적진에 뛰어들어 고경명이 “살아서 후일을 기약하라”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왜군이 고경명에게 내리친 칼을 대신 맞고 끝내 전사했다.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대사간에 추증되었으며, 뒤에 광주(光州) 포충사(褒忠祠)와 금산 종용당(從容堂)에 제향되었다.

조선이 낳은 임란최초의 의병장 유팽로. 그의 부인과 애마가 함께 세상을 떠나 그에게는 후손이 없다고 한다. 그는 실천하는 유자였다. 구국의 창의를 통해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덕목을 실행했던 것이다. 호남연합6000의병의 창의를 주도한 그의 노력은 전투 중 왜군의 북상을 늦추게 해 관군과 의병이 전열을 가다듬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유팽로 선생의 문집으로 『월파집』(3권 1책)이 남아 있고, 관련 유적으로는 옥과면 합강리에 정렬각, 도산사 그리고 입면 송전리에 의마총(義馬塚)이 있다.

‘제6회 의병의 날’을 맞아 곡성이 낳은 임진왜란의 영웅, 유팽로 의병장을 흠모하면서 국가를 위해 희생하신 의병 및 선열들을 추모하는 마음 끝이 없다.

최신 HOT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