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스름 봄날 저녁에
으스름 봄날 저녁에
  • 문틈 시인/ 시민기자
  • 승인 2016.05.19 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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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막 서산에 지고 땅거미가 내려올 즈음 대기에 아직 남은 햇빛 부스러기들과 희미한 어둠이 섞이는 캄캄하지도 환하지도 않은 으스름 봄날 저녁이다. 바람은 어린 아이의 손처럼 부드럽게 뺨을 더듬듯 남녘에서 불어오고 길가의 꽃들은 그 테두리가 잠시 더욱 선명해 보이는 이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새나오는 행복이라는 말을 두 입술 사이에서 빠져나가지 않게 가만히 물고 있다.

그 누구와도 이 포근하고 아름답고 기분 좋은 고즈넉한 순간을 함께 하지 않아도 좋은 이 절대한 기쁨을 온몸이 짜릿하도록 느낀다. 영혼이 진동하는 듯한 살아있음에 대한 감각, 대지가 내게 주는 축복으로 행복을 체험한다. 내가 지금 이 순간 ‘아름답다’고 하면 일순 온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세상이 ‘평화스럽다’ 하면 평화스러워질 것만 같은 5월 봄날 저녁에는 그것을 상찬하기 위해 한 가마니의 말들도 필요 없다.

저무는 봄날 저녁의 자락을 쥐고 말없이 이 대지가 안아오는 포옹에 그대로 나를 맡겨두고 있을 따름이다. 일찍이 그 무엇으로부터도 이런 봄날 저녁이 안겨주는 것 같은 생의 환희를 느껴보지 못했다. 향그러운 대지가 펼쳐주는 봄날 저녁의 향연이야말로 사람이 대지의 자손임을 깨닫게 한다.

나는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는다. 그리고 다가오는 내일도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지금 여기 봄 저녁에 이윽고 사라져가는 햇살과 짙어오는 해으름 사이에서 말을 잃고 무엇인가의 텅 빈 존재의 가운데로 향한다.
길가에 하얀 철쭉꽃들이 무더기로 피어 있다. 그 꽃들도 말없이 차츰 저녁 어둠 속으로 안겨 들어가고 있다. 저 쪽 산봉우리께 하늘에는 아직도 약간 붉은 기운이 남아 있다. 구름이 그 붉은 색을 마저 지우고 있는 것이 보인다.

나는 한참 동안 서서 봄 저녁이 자아내는 이 행복한 분위기를 마치도 누구에게라도 들킬까봐 차차 어두워지는 속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내가 저녁이고 저녁이 나라고 할, 그런 때, 그런 공간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가 슬금슬금 물러난다.

대저 이 순간을 묘사할 무슨 말이 필요할까. 나를 가만히 끌어안는 이 봄날 저녁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마을에는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쁜 소식도 없었다. 그것 말고 무엇을 더 바라랴.

벌써 부드러운 하늘에는 지상의 봄 저녁을 내다보려고 별들이 하나 둘 불을 밝히고 있다. 무사태평한 이 저녁에는 제발 그 누구도 울거나 큰소리를 지르거나 남을 욕하지도 말았으면 좋겠다. 어둠이 더 짙어온다. 나는 봄밤의 저녁이 어떻게 마을로 오는지 목격하고 있다. 나뭇잎새 하나도 건들지 않고 눈썹도 스치지 않고 고양이 발걸음처럼 아주 조심조심 오고 있다.

저녁이 오는 것을 보면서 문득 봄밤이 짧다고 불평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하기사 나는 새들이 숲으로 자러 오면 나도 잠자리에 들고, 새들이 깨어나면 나도 눈을 뜨니 봄이나 겨울에 대고 불평을 하지는 않는다. 내 경험에 의하면 ‘새들 따라하기’가 가장 좋은 삶의 매뉴얼이다.

그렇긴 하지만 오늘같은 봄 저녁에는 조금 늦게까지 나와 자연과의 이 아름다운 관계를 귀히 여겨 보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잠자리에 들까말까 하는 참에 윗층에 사는 젊은 아이 엄마가 문을 두드리고는 “우리 집 아이가 늦게까지 뛰어다녀서 층간소음 때문에 죄송합니다.” 하길래 “아이가 뛰어다녀야지 그럼 가두워 놓으시게요?”하고 짐짓 너그럽게 응대했더니 고맙다며 연신 절을 한다. 이것 역시도 봄날의 저녁이 자아낸 풍경이 아니겠는가.

봄날 저녁에는 허허로운 것이 가득찬 것이라는 말이 그대로 참 알아듣기 쉽다. 대낮엔 여름 날씨만큼이나 30도를 오르내리는 땡볕을 보다가 미세먼지도, 변덕스런 날씨도, 덥지도, 춥지도 않고, 바람이 마치 맞게 부는 푸른 봄 저녁의 한때 나는 담벼락도, 철조망도, 국경도, 조국도 생각하지 않고 서럽도록 행복한 말 한 마디를 몰래 입술에 물고 잠이 들려 한다. 으스름 봄 저녁엔 꽃들도 나무도 하늘도 샛강도 새도 아이들도 모두 다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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