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1) 지호로①
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1) 지호로①
  • 박용구 기자
  • 승인 2016.05.12 17: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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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대표하는 현대 서양화가인 오지호 화백 이름을 따서 명명

지난해 <시민의소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지역공동체캠페인 사업으로 ‘함께 길을 걸어요’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도로명 홍보에 나선 바 있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시민의소리>는 광주광역시 도로명 중에 역사적 인물의 이름이나 호를 따서 명명된 도로명들이 많다는 사실과 함께 왜 이러한 이름의 도로명이 생겨났는지를 모르는 시민들이 꽤 많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시민의소리>는 올해 다시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공동체캠페인 지원사업으로 ‘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지난해 보도를 마친 20개 구간을 제외하고 역사적 인물의 이름이나 호를 따서 명명된 20개 구간을 중심으로 역사적 인물소개, 명명된 의미, 도로의 현주소, 주민 인터뷰 등을 밀착 취재해 이를 널리 알리고자 한다./편집자주

 

▲ 오지호 화백과 지호로에 대한 설명이 들어있는 안내판

광주에는 지호로가 있다. 지호로는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한국적 인상주의 화가로, 그리고 광주를 대표하는 현대 서양화가로 평가받고 있는 오지호 화백의 이름을 딴 도로명이다.

지호로는 옛 동명동 7-2번지에서 시작해서 옛 산수동 5-2번지에 끝나고, 그 길이는 2353m다. 2009년 11월 26일 고시됐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 옛 제1순환도로에서 지산유원지로 가는 길이다.

이 도로가 오지호 화백의 이름을 딴 것이니 여기서 먼저 정인서 광주 서구문화원장의 말을 빌려 오 화백과 만나보자.

모후산인(母后山人), 오지호

오지호는 1905년 전남 화순 동복 모후산 자락에서 구한말 보성군수를 지낸 오재영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은 점수(占壽)였고, 동복보통학교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다.

모후산은 화순군의 중동부에 위치하며 동복면과 남면, 순천시 주암면과 송광면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그림 같은 주암호와 무등산, 조계산 그리고 멀리 지리산까지 보이는 산세가 웅장하고 수려한 산이다.

그래서 오지호를 모후산인(母后山人)이라 부른다. 이곳은 오지호(吳之湖, 1905∼1982)의 생가가 있는 곳이며, 그는 생을 마감한 뒤에도 빛이 가장 아름답게 비치는 모후산의 선영에 묻혔다.

오지호는 광주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후진양성을 통해 호남의 서양화단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한국미술사에서도 한국의 인상주의 화가로 주목받았다. 그는 서양화를 신문물로 받아들여 조선의 미술을 개선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남도서양화의 1세대 터줏대감

오지호는 한국근현대미술사의 거인이었고, 지역예술계는 물론 문화중심도시 광주의 오늘을 존재하게 한

▲ 오지호 화백

제1세대 터줏대감이었다. 광주미술연구회를 조직하는 한편 조선대학교 미술과 교수를 역임하면서 인재양성에 힘썼으며, 남도화단의 큰 화맥을 형성하고, 이를 이끌어온 스승이었다.

오지호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누구보다도 서양화를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태도로 수용한 화가였다. 어려서 민족자주적인 개화론자였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일찍이 학문에 눈을 뜨고 고교에 진학하면서 신문화와 신미술에 눈을 떴다. 끊임없는 예술적인 탐구열을 일으켜 근대화란 개념을 이해하고 한국 인상파의 문을 연 선구자로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오지호는 서울에서의 고교생활과 일본에서의 유학 생활을 통해 그림에의 열정을 불태웠다. 이후 개성에서 교편생활을 하며 작품활동을 하다가 1938년 《오지호 김주경 2인 화집》을 발행함으로써 한국회화사의 한 획을 그었다.

오지호는 일본을 징검다리 삼아 우리나라에 서구의 유화 물결이 밀려든 시절, 남도 화단으로 유입되는 서양화의 물꼬에 삽질을 시작한 인물이다. 한국근대미술을 설명할 때 그는 서양화가 1세대로 분류된다.

한국적 풍토에 맞는 인상주의 미학을 수립

당시 많은 화가들이 그러했듯이 오지호는 일본 도쿄(東京)미술학교 수학 시절, 외광파(外光派)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작품 활동은 무조건적인 단순한 수용에 그치지 않고,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적 풍토에 맞는 인상주의 미학을 수립하는 데 힘썼다.

1930년대 조선향토색 논쟁은 일제강점기의 조선이라는 고유성에 대한 성찰인 동시에, <조선미술전람회(선전)>의 제도 미술을 위한 아카데미즘을 보여주었다. 물론 오늘날에도 한국 미술계에서 지역성의 논의는 여전히 이러한 맥락 안에 놓여 있다.

1960년대 이후의 작품에서는 짙은 암청색의 거친 붓질이 드러나면서 자율적인 공간을 구성하기 위해 그리고자 하는 대상의 형태를 단순화 시키고 주관적인 감성이 강조되었다. 말년에는 유럽여행의 감흥을 분출시킨 자유분방한 필치의 작품을 다수 남겼다.

오지호는 우리나라 자연의 밝고 맑은 풍광을 색채화하며 작품에 담으려 했다. 그래서 오늘날 인상주의 미술의 한국적인 토착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상주의를 이론과 실제의 양면에서 철저히 추구함으로써 한국 인상주의 회화 운동의 기수가 되었다. 늘 새로운 눈으로 탐구하고 실현함으로써 미술이론의 정립에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오지호는 유화의 ‘한국적 정착과 자기화’라는 문제에서 근대기의 작가 중 가장 주목받는 사람임에 분명하다. 이는 그가 동시대 화가들에 비해 시대정신과 시각이 그만큼 앞서 있었음을 말해 준다.

오지호는 작품 활동 이외에도 자신의 예술이념과 사상을 이론적으로 발언한 <구상회화선언>(1959) 등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1968년에 미술평론집 『현대회화의 근본문제』를 출판했다.

국한문혼용운동에 앞장...<국어교본> 출판하기도

1970년 정부가 모든 교과서에서 한자를 제거하자 작품 활동을 뒤로 하고 한자 폐지에 대한 폐해를 역설한 <국어에 대한 중대한 오해>라는 글을 써 한자 교육의 타당성과 필요성을 깨닫게 하고 1975년 다시 한자 교육을 부활시킨다는 방침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더불어 문화재 보호 운동에 앞장서는가 하면 양심수에 대한 구명운동을 펼쳤고, 민족의 최대 명절인 설을 공휴일로 지정하자는 건의문을 신문에 발표하기도 했던 앞선 지식인이었다.

 

▲ 오지호 화백의 화실을 설명하고 있는 이상실 여사

이와 관련 오지호 화백의 며느리인 이상실 여사(오승윤 화백의 처)는 “아버님은 화가일 뿐만 아니라 민족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다”면서 “정부가 교과서에 한자 사용을 금지하자 모든 작품활동을 접고 사비를 털어 국한문혼용운동에 앞장섰다”고 회고했다.

이어 그는 “아버님은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하지 못하는 분이셨다”면서 “이를 위해 작품활동을 접고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用 <국어교본>을 출판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오지호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 및 초대작가, 심사위원을 역임했으며, 1973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 1977년에는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수상했다. 그는 1982년 12월 25일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85년 미망인 지양진 여사가 국립현대미술관에 유작 34점을 기증했으며, 2002년에는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주요 작품에는 《나부(裸婦)》(1928), 《아내의 상》(1936), 《사과밭》(1937), 《도원풍경》(1937), 《남향집》(1939), 《가을풍경》(1953), 《열대어》(1964), 《항구》(1967), 《무등산》(1969), 《만추》(1969), 《과수원 풍경》(1972), 《함부르크 풍경》(1974), 《선운사 설경》(1979), 《가을풍경》(1981) 등이 있다.

저서로는 원색판 『오지호 작품집』(1978)과 미술평론집 『현대회화의 근본문제』(1968), 시론 『알파벳 문명의 종언』(1979) , 미학원론으로 『미와 회화의 과학』(1992) 등을 남겼다.(출처 두산백과)

이와 같은 오지호 화백을 기리는 지호로는 필문대로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사거리에서 시작된다. 이 길은 동명동 끝자락 일부와 산수동 끝자락에 아주 조금 걸쳐 있지만 대부분은 지산동에 위치하는 2차로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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