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기록문화유산(16) 호남 유산기
호남기록문화유산(16) 호남 유산기
  • 김순영 호남지방문헌연구소 연구원
  • 승인 2016.05.12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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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 예로부터 호남 제일의 명산(名山)으로 불리다
1604년에 지은 정상(鄭詳)의 <월출산유산록(月出山遊山錄)>이 최초의 유산기

 월출산, 예로부터 호남 제일의 명산(名山)으로 불리다

-1604년에 지은 정상(鄭詳)<월출산유산록(月出山遊山錄)>이 최초의 유산기
 
우리나라에는 많은 명산(名山)이 있다. 오랫동안 명산으로 불리는 데는 분명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호남에서는 호남의 절의(節義) 정신을 보여주는 광주의 무등산(지금의 무등산), 신령하고 영험한 기운이 느껴지는 영암의 월출산 등이 그러하다. 그러므로 명산을 찾는 유산객들의 발길은 예나 지금이나 끊이지 않는다.
 
호남에서 유산기가 많이 남아 있는 산은 광주의 서석산(瑞石山), 전남의 월출산(月出山)과 천관산(天冠山), 전북의 덕유산(德裕山)과 변산(邊山) 등이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은 유산기가 남아 있는 곳은 광주의 서석산이고, 그 다음으로 많이 남아 있는 곳이 영암의 월출산과 장흥의 천관산이다. 이번 호에서는 월출산 유산기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구정봉(九井峰)과 영암(靈巖)
 
월출산은 우리나라 19번째 국립공원으로, 지리산, 장흥의 천관산, 부안의 변산, 정읍의 내장산과 더불어 호남의 5대 명산으로 불린다. 호남 유산기 작품들에서도 󰡐월출산󰡑이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예로부터 월출산이 호남의 명산이었음을 말해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신라 때는 월출산을 월나산(月奈山)이라 불렀고, 고려 때는 월생산(月生山)이라고 불렀다. 또 작은 금강산(일명 소금강)이라고도 하며, 또 조계산(曹溪山)이라고도 하였다.
 
또한 월출산 구정봉(九井峯)에 대해서는 꼭대기에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높이가 두 길이나 되고, 곁에 한 구멍이 있어 겨우 사람 하나가 드나들 만하다. 그 구멍을 따라 꼭대기에 올라가면 20여 명이 앉을 수 있는데, 그 편평한 곳에 오목하여 물이 담겨 있는 동이 같은 곳이 아홉이 있어 구정봉이라 이름 붙인 것이니, 아무리 가물어도 그 물은 마르지 않는다. 속설에 아홉 용이 그곳에 있었다고 한다. 동석(動石)은 월출산 구정봉 아래에 있다.
 
특히 층암(層巖) 위에 서있는 세 돌은 높이가 한 길 남짓하고 둘레가 열 아름이나 되는데, 서쪽으로는 산마루에 붙어 있고, 동쪽으로는 절벽을 마주하고 있다. 그 무게는 비록 천백 인을 동원해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으나, 한 사람이 움직이면 떨어질 것 같으면서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암(靈巖)이라 칭하고, 군의 이름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령한 바위를 뜻하는 영암이라는 지명의 유래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와 같은 내용은 세종지리지와 이유원(李裕元, 1814~1888)임하필기(林下筆記)에도 똑같이 실려 있고, 월출산 유산기에도 자주 나온다.
 
월출산 유산기 작품들은
 
현재 월출산 유산기는 약 10여 편 정도가 있다. 월출산 유산기 작품을 창작 시대순으로 살펴보면, 17세기에 4, 18세기에 2, 19세기에 3, 20세기에 1편이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은 17세기에 정상(鄭詳, 1533~1607)이 지은 <월출산유산록(月出山遊山錄)>이다.
 
현재로서는 이 작품이 월출산 유산기의 첫 작품이며, 작품은 그의 문집인 창주유고(滄洲遺稿)에 실려 있다. 정상은 나주에 거주했던 인물로, 1604년에 45일 동안 월출산을 유람하고 이 작품을 남겼다. 작품의 내용을 살펴보면, 정상은 유람 둘째 날에 월출산 정상인 구정봉에 오르게 되는데, 그곳에서 소년 한 명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 있어 따라 올라갔더니 모두 물이 담긴 아홉 개의 웅덩이가 있음을 보았다. 또한 스님이 흔들면 땅으로 떨어질 것 같은 바위를 보고, 이로 인해 군()의 지명이 영암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17세기의 또 다른 작품으로 김창협(金昌協, 1651~1708)<등월출산구정봉기(登月出山九井峰記)>가 있다. 이 작품은 김창협이 25세 때인 16757월에 영암(靈巖)에 유배중인 아버지를 찾아왔다가 8월에 월출산 구정봉을 유람하고 그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작품은 그의 문집인 농암집(農巖集)에 실려 있다.
 
김창협은 구정봉을 '사방이 모두 깎아지른 듯한 높은 절벽으로 되어 있다. 오직 서쪽 벼랑 아래에 있는, 직경이 겨우 한 자쯤 되는 작은 굴이 위로 뚫려 꼭대기까지 통해 있어서, 꼭대기에 오를 때에는 반드시 굴속을 통해야 한다. 이 굴속으로 들어갈 때에는 반드시 뱀처럼 포복해야 들어갈 수 있다.'라고 설명하며, 이 굴을 통과하는 과정을 자세히 묘사했다.
 
또한 김창협은 월출산을 유람하고 구정봉에 대한 시를 한 편 남겼는데,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조물주가 아홉 용 살리기 위해 / 天爲九龍居드높은 산봉우리 만들었건만 / 峨峨作高峯변화해 사라진 지 몇 해 이런고 / 變化曾幾年꿈틀대던 옛 자취 흔적 없구나 / 蜿蜒空舊蹤어쩌면 한 우물속 물이 / 尙疑一斛水저 아래 큰 바다와 통해 있을지 / 下與滄溟通
 
18세기 월출산 유산기의 대표적 작품은 정식(鄭栻, 1683~1746)이 지은 <월출산록(月出山錄)>이다. 정식은 <월출산록>에서 호남의 명산 중 제일은 월출산이고, 그 다음은 천관산이라고 설명했다. 정식은 경상도 문인으로 하동광양순천보성장흥강진을 거쳐 월출산과 천관산을 유람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일기형식으로 서술하였다.
 
19세기 월출산 유산기를 대표할 수 있는 작품은 송병선(宋秉璿, 1836~1905)<유월출천관산기(遊月出天冠山記)>이다. 송병선은 19세기 호남의 대표적 유기문학가로 많은 유산기 작품을 남겼다. <유월출천관산기>1898년에 지은 것으로, 당시 송병선 나이 63세였다. 작품은 그의 문집인 연재집(淵齋集)에 실려 있다.
 
송병선은 고부(古阜)의 만종재(萬宗齋)에서 행음주례를 행하고, 영암의 월출산과 장흥의 천관산을 둘러보았다. 송병선도 유산기에 󰡐영암󰡑이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구정봉 서북쪽 봉우리에 바위가 하나 있는데, 흔들거리며 번번이 움직여서 영암(靈巖)이라 부른다. 영암군의 이름이 여기에서 나왔다고 한다"라고 하였다.
 
▲ 20세기 양회갑의 <월출산 유산기>
월출산 유산기의 마지막 작품은 20세기 양회갑(梁會甲, 1884~1961)<월출산기(月出山記)>이다. 양회갑은 20세기 호남을 대표하는 유기문학가(遊記文學家)로 송병선과 같이 많은 유산기를 남겼다. 양회갑은 화순 출신으로 주로 남도 지방을 유람하였으며, 이 작품은 그의 문집인 정재집(正齋集)에 실려 있다.
 
옛 선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이처럼 월출산은 예로부터 호남 제일의 명산으로 불리어 많은 문인들이 이곳을 찾아 유람하였다. 실제로는 유산기와 같은 산문 형식의 작품보다 월출산 유람을 담은 한시 작품들이 더 많이 남아 있지만, 월출산의 경관과 유람의 모든 과정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는 것은 역시 유산기 작품들이다.
 
따라서 호남지방문헌연구소에서는 호남 산과 관련 시문 작품들을 지역별로 조사하여 작품들을 모으는 일을 하고 있다. 이렇게 지역별로 작품들이 모아지면 지역 문학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월출산을 등산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요즘, 정상에 오르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이러한 유산기 작품들을 통하여 우리 옛 선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가보며 유산(遊山)의 또다른 즐거움을 느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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