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멋을 찾아서(4) 아리문화예술단 단장 채춘례
남도의 멋을 찾아서(4) 아리문화예술단 단장 채춘례
  • 유현주 수습기자
  • 승인 2016.05.12 02: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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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락장단 널리 알리고파”

▲ 채춘례 아리문화예술단 단장
어릴 땐 엄마가 장구나 무용을 하는 게 싫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가 그 당시에 인생을 정말 잘 살았던 것 같아요.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며 살았으니까. 엄마가 돌아가셨어도, 지금껏 엄마만큼 소리를 잘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또 엄마 뱃속에서부터 그 재능을 물려받은 덕에 지금의 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장구를 치며 공연을 하는 엄마가 이유 없이 싫었던 세, 네 살배기 어린 시절. 엄마가 하는 일은 싫었지만, 엄마가 공연을 할 때면 앞으로 나가 덩실덩실 춤을 추며 타고난 끼를 뽐내던 그녀다.

채춘례(57) 씨는 어릴 적부터 풍물패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던 것은 기본이요, 어머니가 친한 지인들을 불러 가락 수업을 할 때면 가락을 틀린 사람들에게 다가가 이모 그거 틀렸어라며 틀린 부분을 알려주기까지 했다. 지금말로 소위 영재였던 것이다.

그런 채 씨의 끼를 일찌감치 발견한 춘례 씨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전통 소리를 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그녀는 어머니의 권유를 피해 이리저리 도망쳤다. 철없던 시절엔 어머니가 하는 일이 마냥 싫게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던 스물일곱 살의 어느 날. 불현듯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그녀를 스쳐지나갔다. 어릴 적엔 어머니가 하던 가락장단이 싫었지만 스물일곱 당시에는 이상하게도 가락장단이 그리웠다. 이렇게 해서 채춘례 씨는 전통 예술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지금은 문화센터 등지에서 국악 강의를 약방의 감초처럼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채 씨가 국악을 배우기로 결심했던 당시에 국악 강의를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침 판소리 대가인 조상현 선생이 광주시립국극단에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남편이 수업 등록을 해준 덕에 채춘례 씨는 끝없는 배움의 길에 들어섰다.

▲ 소리를 하며 북을 치는 채춘례 단장
수업 끝나고 집에 돌아와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라며 그 날 배운 소리를 불러본다거나, 집에 큰 거울을 사다놓고 무용이나 발림 연습을 하면 아이들은 엄마가 그거 안했으면 좋겠다면서 싫어했어요. 하지만 남편이 강의를 찾아보고 등록을 해주는 등 많이 도와줬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데엔 남편의 도움이 컸던 것 같아요. 정말 고맙죠. 제가 가고 싶은 길을 가도록 옆에서 지지해주니까

남편의 도움으로 조상현 선생의 수업을 들으며 판소리를 배우고 나니 장단도 배우고 싶어졌다. 장단 선생을 찾아가 또 장단을 배우니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장단 가락이 귀에 익었던 터라 너무나도 쉽게 느껴졌다. 장단을 한 번 들으면 저절로 머릿속에서 다양한 장단이 구성됐다. 하나를 배우면 두 개, 세 개도 터득했다. 장단에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있던 채춘례 씨는 29살이 되어 가락장단 강사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강사로 활동하면서도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판소리, 장단, , 민요, 발림, 무용 등 다양한 분야를 배우며 그녀는 진정한 전통 소리꾼으로 성장해나갔다. 그녀는 집에서도, 장을 보러 가는 길에도 쉴 새 없이 발동작으로, 걸음으로, 입으로 덩 쿵딱 쿵따쿵 거리며 장단을 외웠다.

혼자 중얼거리며 장단을 외우는 동안 웃지 못 할 해프닝도 생겨났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채 씨를 미친 여자라고 오해한 것이다. 아이를 업은 젊은 새댁이 동네 사람들과는 교류가 없이 혼자서 중얼거리며 돌아다니니 그도 그럴 만 했다며 채 씨는 그 당시를 회상 한다.

아기를 업고 장을 보러 시장에 가 걸어 다니면서 덩 쿵딱 쿵따쿵 업모리 장단을 외웠어요. 아기를 업은 여자가 혼자 덩 쿵딱 쿵따쿵 이러면서 다니니까 사람들이 저 새댁은 미쳤어”, “정신이 이상한가봐수군거리면서 소문이 퍼진 거죠. 저는 전혀 몰랐어요. 그러던 어느 날 남구 문화원에서 강의를 하는데 우리 아파트 사람이 들어오다가 선생님이었어요?”라면서 깜짝 놀라더라고요. 그러더니 동네 사람들이 미친 여자로 오해를 했었다고 정말 죄송하다고 그러더라고요. 동네 사람들하고 인사도 안하고 혼자 중얼거리며 돌아다니니까 사람들이 오해를 했던 거죠

타고난 끼와 재능으로 인해 오해를 받으며 웃지 못 할 해프닝을 낳기도 했지만, 그녀는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배움의 길을 닦았다. 어느 날 자신이 배운 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든 채 씨는 자신이 가락장단을 배우면서 터득한 노하우를 모아 <초보자를 위한 북과 장구>라는 책을 펴냈다.

▲ 공연에서 힘차게 북을 치는 채춘례 아리문화예술단 단장
처음 북이나 장구를 접하는 초보자의 수준에 맞춰 자신의 경험을 담아 최대한 쉽게 써냈다. 또 자신의 책으로 공부하는 노인들을 위해 글자도 큼직큼직하게 썼다. 책의 가격을 낮추기 위해 출판사측에 인세를 받지 않겠다는 파격적인 조건도 내걸었다. 많은 사람들이 전통 음악을 배웠으면 하는 마음 하나만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채 씨의 책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제가 쓴 책이 대학 전공수업이나 문화센터 강좌 등 여러 수업에서 유용하게 쓰인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정말 잘 됐다고 생각해요. 뿌듯하죠. 많은 사람들이 제 책을 쉽게 찾아서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 500권을 따로 구입해 학교 등지에 보내기도 했죠. 지금은 2권을 쓰는 중이에요. 일반 학생들이나 전공자들이 볼 수 있는 책으로요

장흥안양초등학교, 조선대학교 평생교육원, 광주여자대학교, 남구문화원 등지에서의 강사 활동, 개인교습과 책 출판, 그리고 비영리 민간 예술단체인 아리문화동아리와 아리문화예술단을 이끄는 채춘례 씨. 다양한 활동으로도 하루하루가 빠듯하지만 그녀는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배움의 끈을 단단히 부여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제가 젊었을 때는 국악을 배우고 싶어도 국악을 배우는 과가 너무나 적었어요. 근데 요즘은 서양음악하고 동양음악이 어우러진 퓨전이 떠오르면서 실용음악과에도 국악과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2000년도에 남부대 실용음악과에 신입생으로 들어갔어요. 서양음악의 이론도 배우고 또 서양음악에 내 전공 분야인 국악도 배우고. 열심히 공부해서 2014년도엔 교원 자격증도 취득했어요

▲ 키보드, 드럼 등 서양의 악기와 북, 장구 등 동양의 악기가 어우러진 아리문화예술단의 창작공연
요즘 채춘례 씨는 자신이 배운 것들을 나눔으로써 삶의 보람을 느끼고 있다. 그녀는 늘 전통 음악을 찾아주는 이만 있다면 어디든지 달려갈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제가 배우고 터득했던 것들을 사람들과 나누다보니 정말 뿌듯했어요. 이런 뿌듯한 마음이 봉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변했고요. 2010년 비영리단체인 아리문화예술단을 만들어서 독거노인 경로잔치 등을 다니며 무료로 공연을 했어요. 부르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지 가서 공연을 하죠. 공연비용을 많이 주면 많이 받고, 적게 주면 적게 받고, 없으면 그냥 무료로 가서 공연을 해요. 돈에 쫓아가지 않고 그야말로 봉사를 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이죠

전통 음악을 사랑하고, 봉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아리문화예술단은 150명의 단원이 있는 대규모 예술단체가 되었다. 채춘례 씨는 가야금, 무용, 타악, 난타, 판소리, 민요 등 국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여 가능해요. 봉사를 하고자 하는 마음만 준비물로 가져오면 되죠라며 국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나눔을 실천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인다.

▲ 채춘례 단장이 기획하고 구성한 창작 사물놀이 공연
가끔 주변에선 선생님 같이 몇 십 년 공부하고 교원 이수까지 다 한 분이 왜 무료로 하냐고 물어보곤 해요. 이제는 돈 벌 때가 되지 않았냐며 걱정 섞인 말들을 하죠. 그럼 저는 20대 시절 항상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지금까지 왔기 때문에 돈을 쫓아가지 않는다고 대답해요. 또 공연하면 돈도 벌고 강의하면 강의료도 나오니 그 돈으로 내 용돈과 생활비, 학원 운영비는 충분하다고 말해요.

돈에 욕심은 없어요. 돈을 쫓아가지 않아야 겠다는 생각도 들고. 오히려 봉사하는 마음을 갖고, 시민들에게 나도 뭔가 보여줘야겠다이런 생각이 들어요. 죽을 때까지 그 마음을 갖고 가려고요. 더 나이 들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해야죠. 나이가 들면 제가 이끌고 있는 아리문화예술단의 대표 자리도 뜻 있는 젊은 사람에게 물려줄 의향도 있어요. 요즘은 젊은 사람들이 이끌어야죠. 나는 좀 더 하다가 후원하는 쪽으로 갈 생각이에요

엄마가 전통음악을 하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신명나는 가락이 울려 퍼지면 저절로 덩실덩실 춤을 추던 끼 많은 어린 아이는 어느 덧 세월이 흘러 전통 음악을 널리 알리고자 힘쓰는 예술인이 되었다. 강의, 봉사활동 등으로 몸이 여럿이어도 바쁜 나날을 보내지만 이러한 활동들에서 오는 성취감은 그 무엇도 따라잡을 수 없다.

한 때는 배우는 데서 오는 즐거움에 행복했던 그녀라면, 이젠 그 배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나누는 것에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을 느낀다는 채춘례 씨.

▲ 2013년 운천저수지 앞에서 열린 공연에서
젊은 친구들이 봉사를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봉사도 그냥 단순한 청소 이런 게 아니라 요양원 등에서 어르신들을 만나며 소통하는 그런 봉사활동이요. 봉사를 하다보면 뿌듯한 마음 때문에 마음이 편안해지고, 스스로 배우는 점도 많아요. 타인과 나누는 것에서 오는 즐거움을 젊은 사람들이 많이 알아주었으면 해요. 저도 20대 때 항상 나는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겠다고 다짐하고 이 마음을 지금까지 간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이러한 결심을 했던 게 정말 제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준 것 같아요

어릴 땐 엄마가 하는 장구나 무용이 마냥 싫게만 느껴졌지만, 어머니의 끼를 뱃속에서부터 물려받아 지금의 내가 있었다고 말하는 채춘례 씨. 그녀의 배움에 대한 끝없는 열의와 봉사에 대한 뜨거운 열정은 지금도 식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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