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다루는 일은 인간이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한 선사시대부터 시작했지만 목수라는 기록은 신라시대에 처음 등장했으며, 소목장이라는 명칭은 고려시대부터 불러진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초까지는 목가구가 주로 왕실과 상류계층을 위해 만들어졌으나, 조선 후기에 민간에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나무의 자급자족에 따른 지역적 특성이 본격적으로 나타 난 것으로 보는 것이 현재 학계의 정설이다.
조선시대의 소목장은 조각장, 나전장 등과 더불어 중상서에 예속됐다. 경국대전에서도 이들을 일괄해 목장(木匠)으로 분류하면서 세분화를 통해 수레장, 선장, 통장, 표통장, 마조장, 풍물장, 안자장, 목소장, 목영장을 따로 두어 경공장의 전문 직종으로 관리했다.
호남지역의 소목장은 전주, 남원, 나주, 보성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고장에는 최근까지도 미약하게 보존 전승되고 있다. 그중에서 나주는 조선시대부터 1960년대까지 목물공방이 가장 활성화된 대표적인 도시였다.
조선왕실에 목물 제작·공급했던 나주 소목공방
나주는 호남지역의 주요목물을 생산하는 도시였다. 조선 후기부터 1970년대까지만 해도 문방구나 장롱을 제작하는 공방들이 거의 한 집 건너 하나씩일 정도로 즐비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3~40명을 목수를 거느린 이씨소목방, 박씨소목방, 조씨소목방, 안씨소목방 등 대형 공방이 8개 이상이나 있을 정도로 생산규모가 컸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활황을 나주의 목물산업은 70년대 후반 들어 급격하게 쇠퇴되고 만다. 대기업의 가구업계 진출로 인한 값싼 기성품 등장이 이들의 생존권을 뺏어버린 것이었다. 한때 나주지역의 주요 산업역군으로 활동해온 이들은 결국 삶을 위해 하나 둘씩 새로운 일자릴 찾아 떠나거나 건축현장의 내장목수로 전환해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금 현재 나주지역에는 최근 무형문화재 소반장으로 지정된 김춘식씨와 영산포의 윤재술, 다시의 추연씨 등이 나주를 떠나지 않고 활동하고 있다.
나주를 대표하는 이들 소목장들 중 실력에 비해 항상 그늘에 가려진 인물로 평가를 받아온 윤재술 소목장을 만났다.
나주목물의 전설 김창선, 김백조 소목장의 제자
작품제작에 전통기법만 고집하는 우직한 ‘종합소목장’
말이 나온 김에 바로 영강동에 위치한 윤 선생의 목물공방을 찾아갔다. 그런데 공방이 사라졌다. 도로공사관계로 공방이 헐려 가야산 아래로 이전했단다. 그 동안 너무 잊고 살았나 보다. 전화도 주지 않고 불쑥 찾은 것이 내심 부끄럽다. 하지만 염치 불구하고 가야산 아래에 위치한 공방을 찾아 갔다. 마당의 나무건조장에서 나무를 살피고 계셨다. 기자를 보자 오랜만이라고 반긴다. 윤 선생의 손놀림이 분주했다. 윤 선생은 “좋은 나무를 찾고 있다면서 나무의 성질을 죽여 작품으로 만들어도 무리가 없을 좋은 나무를 찾고 있다”고 했다.
윤 선생은 “나무는 죽어서도 살아 숨 쉬는 재료”라면서 “아무리 좋은 재료라도 100%로 곧을 수는 없어 숨을 죽이는 작업은 필수이며 나무의 성질을 다스리는 것은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는 노하우”라고 말한다. 이어 “사계절 순환에 따라 수축과 이완을 거듭함으로 가능한 많은 나무를 다뤄보고 그 성질을 파악해 그 쓰임을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 선생은 “좋은 나무란 나무의 결, 즉 목리가 아름다운 나무로 같은 나무라도 어디서 자란 것인가에 따라 성질이 달라진다. 나무마다 말리는 기간도 다르다. 목공예는 어떤 나무를 어떤 가구에 쓸 것인가 적재적소의 쓰임새를 찾는 게 관건이다”고 말했다. 또 “옷칠내기, 민어풀, 아교풀을 만들 재료가 부족해 전통방식으로 처리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 항상 불만”이라고 아쉬워한다. 그는 민어풀은 300백년을, 아교풀은 100년 간다고 설명했다.
자리를 거실로 옮겼다. 아주 자연스런 나무의 미감이 살아 있는 작품들이 집안 가득 자리하고 있다. 윤 선생은 차를 타면서 최근 무형문화재의 지정 문제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다. 자신의 탈락을 많이 서운해 하는 것 같다.
곧이어 윤 선생은 아쉬움을 기자에게 하소연 하듯이 자신의 소목장의 길을 걸어온 내력에 대해 들려주기 시작했다.
강진 태생인 윤 선생은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1958년 당시 소목장 세계에서 제일의 명성을 떨치던 함평 나산의 김창선 소목공방에 들어가 일을 배웠다. 당시 전통소목장인 김창선 선생의 재능은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나주 인근 지역에서는 그의 기술을 따를 자가 없다는 평을 받았을 정도였다.
당대 나주지역의 최고 소목장으로 평가 받은 인물이 운영하는 공방에 입소하는 행운을 윤 선생이 누린 것이다. 하지만 기술의 전수는 쉽지 않았다. 매일 청소하고 심부름 하는 것이 일과의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2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목공예 일을 본격적으로 배우는 기회가 윤 선생에게 왔다.
윤 선생은 “당시 나주 반상의 최고기술자로 알려진 김백조 선생이 김창선 공방에 합류하면서 ‘나주반’을 비롯한 목물에 대해 눈을 떴다”면서 “자신의 나이가 17살 때 김백조 선생의 눈에 들어 나주목물에 대한 역사와 함께 다양한 목물의 제조기술을 2년간 전수 받았다”고 말했다.
윤 선생은 “그 후로 김백조 선생의 제자가 되어 이화공방에서 여러 해 같이 일했다”고 덧붙였다. 윤 선생은 “작은 실수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스승님 자신이나 제자인 윤 선생에게도 엄격한 사람이었다”고 말하면서 정교한 손끝으로 나무를 다루던 스승으로 기억했다.
이들의 인연은 1976년까지 이어져 영산포 이두현 공방에서 같이 지내게 된다. 이런 인연으로 김백조 선생의 나무다루는 재능이 윤 선생에게 자연스럽게 전수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윤 선생은 1976년 7월 ‘고미예술사’라는 목물공방을 개설하고 지금까지 나주목물에 대한 전통기술을 지키면서 종합소목장의 길을 걸어오고 있다. 종합소목장이란 특정한 품목에 한정되지 않고 모든 목공예에 통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주목가구의 특징은 못 박지 않고도 빈틈없이 얽혀 자연스러운 이음새로 완성되어 단정하고 깨끗한 느낌이 들면서도 꾸미지 않은 정갈한 멋을 풍긴다.
기자가 거실에 위치한 나주장에 눈길을 오래 두자 윤 선생은 “나주장의 특징은 동대가 둥그렇게 처리되고 각 틀의 가로 세로의 두께가 같아 튼실함과 실용성에 있어서 최고”라며 “그래서 뒤틀림이나 휘어짐이 적고 수명도 길다”고 나주목물의 우수성을 강조했다.
이어 윤 선생은 나주목물도 “전통을 바탕으로 시대에 맞게 변화돼야 한다”면서 “생활양식과 환경이 변하면서 전통방식으로 만든 가구는 온도와 습도에 민감해 뒤틀리고 갈라지는 문제가 있다. 자신들이 해결해야할 숙제”라고 말했다. 아울러 “나주목물의 정갈하면서도 실용적인 특징을 현대의 생활환경에 부합하는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윤 선생은 “앞으로 전통의 목물을 실생활에 접목시켜 발전시키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소목장의 몫”이라고 말했다. 윤 선생은 “앞으로 남은 생은 이런 숙제를 해결하는데 힘을 보태면서 살아가겠다”고 말하면서 기자에게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웃는 모습이 한 치의 어긋남이 없는 나무 조각상 같아 보인다. 평생을 나무를 다루면서 살아온 윤 선생은 우리시대의 위대한 소목장이다.
한편, 윤재술 소목장은 전국공예품경진대회 특선 및 입선 8회, 나주관광상품전은상, 대한민국현대미술대전 대상 및 우수상을 수상한 숨은 고수다. 현재는 광주·전남 공예협동조합회원, 나주미협회원, 고미예술사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