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 수용소 소견(3)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견(3)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6.05.02 08: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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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의 유대인 정책은 1단계 차별, 2단계 집중, 3단계 절멸(絶滅)의 세 단계를 거쳤다.

1단계는 차별이다. 이 시기는 나치 집권 직후인 1933년부터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39년 9월 이전까지이다.

나치는 1933년부터 유대인 상점에 대하여 불매운동을 벌였고, 유대인은 행정기관, 법원, 대학, 병원, 언론사 등에서 쫓겨났다. 1935년에 뉘른베른크 법이 시행되면서 유대인의 법적 정의가 명확히 되었고, 유대인은 시민권을 잃었으며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결혼도 금지되었다. 주1)

1938년 7월부터는 유대인 식별카드가 도입되었고, 1938년 11월 9일 밤에 일어난 ‘수정의 밤’ 사건 이후에 나치는 모든 유대인 상점과 기업을 몰수했다. 주2) 이후 유대인은 공원 벤치에 앉은 것조차 금지되었다.

#2. 2단계는 집중이다. 나치는 폴란드를 침공한 1939년 9월 이후 제3제국을 아예 ‘유대인 없는 나라’로 만드는 정책을 펼쳤다.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곳곳에 '게토 ghetto(유대인 거주지역)’를 만들었다.

게토는 주로 대도시 지역에 있었고, 높은 담장과 철조망으로 둘러졌고 출입구 바깥에는 무장한 경찰 경비대가 출입을 통제했다.

모든 유대인은 노란 다윗별을 부착해야 했고, 유대인의 삶은 비참함 그 자체였다. 영양실조와 질병, 전염병이 창궐하고 사망자가 급증하였다.

유대인의 25%가 죽음의 강제수용소에 이송되기 전에 죽었고, 특히 체코의 테러진에 세워진 게토의 1942년 사망률은 무려 50%였다.

1940년에 독일의 승전으로 점령지역이 늘어나면서 나치는 유대인을 국외로 보낼 계획을 세웠다. 바로 아프리카 동부해안의 마다가스카르 섬으로 추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독일 해군이 영국에 패하고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3. 3단계는 나치의 표현대로 ‘최종 해결’ 곧 절멸(絶滅)이다. 1941년 6월 히틀러는 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했다. 이후 나치의 유대인 정책에 변화가 생겼다. 나치는 유대인을 게토에 격리시키는 대신 절멸(絶滅), 즉 대량학살을 택했다.

독일군이 소련의 마을을 점령할 때 마다 나치 친위대는 유대인들을 총살했다. 나치는 1942년 봄까지 100만 명이 넘은 유대인을 죽였다.

1942년 1월 20일 베를린 교외의 그로센 반제에서 나치 친위대(SS) 분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주재로 나치 고위장교 들이 '유대인 문제의 마지막 해결책'을 논의했다. 이 회의에서 취해진 결정은 ‘모든 유대인을 체계적으로 동유럽의 수용소로 이송시켜 적절하게 처리한다'는 것이었다.

이 회의에서 나치는 학살이나 처형이라는 말은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으나, '적절하게 처리한다'는 것은 대량학살이 분명했다. 하이드리히는 절멸하여야 할 유대인의 수에 관한 통계도 준비했다. 독일의 동맹국들에 거주한 유대인을 포함하여 전부 1,100만 명이었다.

1942년부터 나치는 유대인 절멸에 착수했다. 아우슈비츠·마이다네크·트레블링카·헤움노·소비부르·베우제츠 등 6개소에 죽음의 수용소가 들어섰다.

(사진 3-1) 나치는 여기에 사워실로 위장한 가스실과 화장장 (火葬場)을 만들었다.
가스학살은 시스템화된 가장 효율적인 대량학살 수단이었다. 각각의 수용소는 하루에 15,000명에서 25,000명씩 처리할 수 있었다.

1944년 6월 6일 아이젠하워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이 프랑스 노르망디를 상륙 이후 연합군은 서부전선에서 승승장구했다. 동유럽에서도 소련이 나치를 잇달아 패퇴시켰다. 전세가 기울자 나치는 그들이 저지른 만행을 감추기 위하여 서둘러 대다수 수용소를 폐쇄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도 그랬다. 1944년 말에 소련군이 수용소 인근까지 진격하자 나치는 관련 문서를 폐기하고 수용소 시설을 파괴했다. 1945.1.17-1.21에 걸쳐 나치는 도보 이동이 가능한 수감자 6만 명을 독일 제3제국 방면으로 이동시켰다. 이 ‘죽음의 행군’ 도중에 1만 5천명이 죽었다

1945년 1월 27일에 소련군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해방시켰다. 수용소 창고 35개 중에서 29개는 이미 파괴되어 있었다. 남은 6개 창고에서 머리카락 7.7톤, 의복 120만 벌과 카펫 13,964개, 산더미 같은 신발과 그릇과 컵 · 가방과 장난감 등이 발견되었다. 수용소에는 7천명이 살아있었다. (사진 3-2 아우슈비츠 1수용소 전경)

(연재는 계속됩니다.)

주1) 나치는 혈통을 아리아인과 비아리아인으로 구분했다. ‘비아리아인’에는 유대인과 2급 혼혈 및 1급 혼혈이 있다. 2급 혼혈은 조부모 1명이 유대인인 사람이다. 1급 혼혈은 조부모 두 사람이 유대인이면서, 1935년 9월 15일 현재 유대교에 속하지 않고 또 유대인과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다. 유대인은 조부모 두 사람이 유대인이면서, 1935년 9월 15일 현재 유대교에 속하거나, 또 유대인과 결혼한 사람, 그리고 조부모 3명 혹은 4명이 유대인인 사람이다. (라울 힐베르크 저, 김학이 역, 홀로코스트 유럽유대인의 파괴 1, 개마고원, 2008, 4장 유대인의 정의 p 134)

주2) 1938년 10월 나치에 의해 독일에서 추방당한 폴란드계 유대인들이 폴란드에서도 입국 거부를 당하자 이들 중 일부가 해외에 있는 가족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파리에서 이 소식을 들은 17세의 독일계 유대인 청년이 11월 7일 파리주재 독일 대사관을 찾아가 3등 서기관을 권총으로 쏘아 죽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11월 9일에 독일에서 대규모 난동이 일어났다. 독일 내 유대인 상점과 유대교회 등이 파괴되고 불탔으며 90명 이상이 사망하고 2만 명이 체포되었다. 이 날 밤 ‘수많은 유리창이 깨져서 밤하늘에 수정처럼 빛났다’하여 ‘수정의 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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