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기록문화유산(14) 죽원자(竹圓子)
호남기록문화유산(14) 죽원자(竹圓子)
  • 양형란 호남지방문헌연구소 연구원
  • 승인 2016.04.28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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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에 만들어진 천문관측기 죽원자(竹圓子)

호남지방문헌연구소(책임자: 전남대 국문과 교수 김대현, 062-513-8033)20162월부터 호남한문고전연구실에서 호남지방문헌연구소로 개칭하였으며 새로운 공간으로 이사하여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호남지방문헌연구소(www.honamculture.or.kr)2002년 설립되어 호남지역의 고문헌 자료를 발굴·조사·정리하고 DB화하며 연구 결과물을 출판하고 있습니다. 고문헌 자료 중에서도 핵심자료인 문집(文集), 지방지(地方誌), 문중문헌(門中文獻)을 중점적으로 조사·연구하며, 연구 결과물은 호남기록문화유산 사이트(www.memoryhonam.co.kr)’에 탑재하고 있습니다. 호남의 귀중한 자료를 집대성하고 DB를 구축할 수 있도록 시민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자문 부탁드립니다.

17세기에도 천문관측기로 천체의 운행을 엿보았을까?
 
호남기록문화유산은 문집·지방지·문중문헌·목판·고문서·고서화·일기 분야 등 다양한 분야의 방대한 자료들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과학적 탐구 정신을 기반으로 혼천의(渾天儀등 천문관측기구의 제작 방법이나, 실생활에 유익한 수차를 제작하는 방법 등 과학적 내용을 담은 다양한 자료들이 많이 있다.
 
조선 후기는 임진왜란·병자호란과 같은 거듭된 이민족의 침입으로 각종 제도의 해이와 민생의 불안이 가중되고, 이로 인해 사상과 정치, 사회와 경제 방면에서 급격한 변동이 일어나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를 살았던 실학자들은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였고, 동시에 실용적 요구에 따라 끊임없이 반성하고 실험하여 경험적이고 구체적으로 현실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선진 과학문물을 받아들여 유용한 과학적 기계를 고안하거나 제작함으로써 자신의 학문적 이론을 실천하였고, 실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제작하여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였다. 그들 속에 17세기 최유지가 있었던 것이다.
 
호남지역에는 최유지 이외에도 부안의 유형원(柳馨遠), 순창의 신경준(申景濬), 장흥의 위백규(魏伯珪), 고창의 황윤석(黃胤錫), 화순 동복의 하백원(河百源) 등의 실학자들이 있다. 또한 화순 동복지역은 나경적(羅景績, 1690~1762)과 그의 제자 안처인(安處仁), 염영서(廉永瑞) 등도 활동했던 곳이었으나 문헌과 자료가 매우 희박하여 깊이 연구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우리에게는 다소 낯선 이름인 17세기 실학자 최유지(崔攸之, 1603~1673)에 대해 살펴보자.
최유지는 세종 때 제작된 혼천의와 현종 때 복원된 혼천의의 원형이 되는죽원자(竹圓子)’를 만든 인물이다. 그가 제작한 죽원자라는 것은 대나무로 6개의 고리를 만들어 천체 운행의 원리에 맞게 배치한 일종의 혼천의(渾天儀)이다. 세종 때에 혼천의가 제작되었으나 양란(兩亂)을 거치면서 대부분 파괴되었다. 그 이후로 성종, 명종, 인조 때에 계속 혼천의를 복원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마침내 효종대에 이르러 최유지의 죽원자를 토대로 혼천의 제작에 성공한 것이다.
▲ 최유지의 죽원자를 근거로 제작한 혼천의
 
최유지의 자는 자유(子有), 호는 간호(艮湖)이고 본관은 삭녕(朔寧)이다. 아버지 성만(星灣) 최연(崔衍, 1576~1651)과 어머니 남원 양씨 사이에서 2남으로 태어나, 숙부인 폄재(砭齋) 최온(崔蘊, 1583~1659)의 양자로 들어갔다. 163028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637년에 소현세자가 심양으로 볼모로 갔을 때 발탁되어 세마(洗馬)가 되었다. 164643세에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한원(翰苑)에 들어갔고, 김제 군수를 지냈으며, 장령, 집의, 교리 등을 역임했다. 165552세에 강진 수령이 되었고 사후 노봉서원(露鋒書院)에 배향 되었다.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최유지의 교유관계는 아직 확실하게 조사, 정리된 것은 없으나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의 유고 속에 최유지와 안부를 주고받은 편지가 있다. 최유지가 쓴 노화설(爐火說)을 윤증에게 보내어 의견을 물어본 것으로 보아 윤증과의 교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윤증은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정치인이며 사상가이다. 명재(明齋유봉(酉峰)은 그의 호이다. 서인 윤선거(尹宣擧)의 아들이며 김집, 유계, 권시, 송시열의 문하생이다. 서인이 노론, 소론으로 분당할 때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성리학자를 자처했고 양명학을 이단이라 규정했으나, 실학사상에는 후한 평가를 주었다. 그는 실학자이면서 남인인 유형원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윤증과 그의 제자 덕촌(德村) 양득중(梁得中, 1665~1742)은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읽고 매우 감탄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삭녕최씨 문중의 <대방세고(帶方世稿)>
최유지의 문집은 대방세고(帶方世稿)안에 있는데 간호집(艮湖集)이라고 한다.대방세고(帶方世稿)는 삭녕최씨(朔寧崔氏) 문중의 세고(世稿)로써대방(帶方)은 최씨가 대대로 세거(世居)했던 남원의 옛 지명이다. 1939년에 최익효(崔翊孝)가 최상중(崔尙重)미능재집(未能齋集), 최연(崔衍)성만집(星灣集), 최온(崔蘊)폄재집(砭齋集), 최휘지(崔徽之)오주집(鰲洲集), 최유지(崔攸之)간호집(艮湖集)35인의 유고를 합철, 편차하여 간행한 것으로 연활자본 175책으로 되어있다. 여기서 세고(世稿)란 몇 대에 걸쳐 남겨진 선조들의 유고를 합철하여 편차, 간행한 것을 말한다.
 
죽원자(竹圓子)란 무엇인가?
 
최유지의 문집인 간호집(艮湖集)속에는 그의 실학자다운 면모를 볼 수 있는 글들이 실려 있는데, 노화설(鑪火說), 목갑설(木甲說),죽원자설(竹圓子說)등이 그것이다. 노화설(鑪火說)심성(心性이기(理氣인심(人心도심(道心) 등의 원리를 논한 것으로 마음은 화로에, 성품은 불에, 인심은 연기에, 도심은 불꽃, 기질은 섶나무에 비유하여 사람의 본성은 같으나 기질에 따라 선악의 차이가 있음을 설명하여 이기(理氣) 일원론(一元論)을 주장한 글이다. 목갑설(木甲說)은 나무로 방패를 제작하는 과정을 설명해 놓은 글이다. 죽원자설(竹圓子說)은 죽원자의 구조와 기능을 상세히 설명하고 그 제작과정을 설명해 놓은 글이다.
 
조선시대에는 관인(官人), 유자(儒子)들이 그렇듯 최유지 역시 서경(書經)요전(堯典), 순전(舜典)의 기삼백(朞三百)과 선기옥형(璿璣玉衡)의 주()주천(周天)의 도수(度數)별자리의 운행일월의 운행 등을 정밀히 학습 하였다. 최유지가 죽원자를 만들게 된 동기도 여기에 있다. 글로는 그 이치를 모두 이해할 수 없는 까닭에 죽원자를 만들어 징험하고자 했던 것이다. 일반인들이 제작해서 쓰기에는 청동이나 주물보다는 구하기 쉬운 목재나 대나무가 적합하여 최유지도 대나무를 이용하여 혼천의를 만들었는데 그래서 이름을 죽원자라고 하였을 것이다.
 
혼천의(渾天儀)라는 것은 지평선을 나타내는 둥근고리와 지평선에 직각으로 교차하는 자오선을 나타내는 둥근고리, 하늘의 적도와 위도 따위를 나타내는 눈금이 달린원형의 고리를 하나로 짜 맞추어 만든 것이다.
 
중국 고대 우주 관념설에는 해와 달과 별들은 공중에 떠서 기()에 따라 운행한다는 선야설(宣夜說), 하늘은 일산(日傘), 땅은 바둑판에 비유한 개천설(蓋天說), 하늘과 땅은 둥근 계란 속에 노른자가 있는 것과 같은 모양으로, 하늘의 절반은 땅 위에 있고 나머지 절반은 땅 밑에 있고, 천체의 남극과 북극은 고정되어 있는 상태에서 해와 달과 별들이 매일 남북극을 잇는 극축(極軸)을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혼천설(渾天說) 등이 있다.
 
혼천의는 이 혼천설(渾天說)에 기초를 두어 서기전 2세기경에 처음 만들어졌다. 삼국시대의 우주관인 이 혼천설은 후한(後漢)의 천문학자인 장형(張衡)의 저서 혼천의주(渾天儀註)에 나오고, 진서·송서·수서천문지(天文志)등에 소개되어 있다. 조선초기에도 권근(權近)논천(論天)이라는 글에 혼천설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조선 초까지 정통적인 우주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우주관은 한나라 문화를 통해 우리나라 천문학 속에 스며들었다. 혼천설은 하늘의 일월(日月) 5(五緯5행성)의 관측을 위한 기계인 혼천의 제작의 기본이 되는 이론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혼천의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세종실록세종1671일자 기사에 “1432(세종14)에 예문관제학 정인지(鄭麟趾), 대제학 정초(鄭招) 등이 왕명을 받아 고전을 조사하고, 중추원사(中樞院事) 이천(李蕆), 호군(護軍) 장영실(蔣英實) 등이 제작하였다.”라고 하였다. 또한 1657효종실록효종8526일 기사에 홍문관에서 지난해에 선기옥형(璿璣玉衡)을 만들라고 하교하여 그 때 강관(講官) 홍처윤(洪處尹)이 이미 명을 받들어 만들어 올렸지만 김제 군수 최유지(崔攸之)가 이미 만든 기형(璣衡) 일구(一具)를 수격식(물을 사용하여 스스로 작동) 제작한 것이 해와 달의 운행 도수와 시각의 흐름이 조금의 오차도 없어서 본 사람은 모두 정밀하고 완벽하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최유지의 서울 집에 보관한 기계를 그가 임지로 떠나기 전에 관상감에서 천문을 웬만큼 이해하는 자 한 사람을 선발하여 가서 법을 배우게 하고, 아울러 솜씨 좋은 목공을 선발하여 그 제도를 모방하여 일구를 본관에 보관하게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 국보 제230호 혼천시계 구성도(김상혁, 2007).혼 천 의: 1. 육합의, 2. 삼신의, 3. 지구의시계장치: 4. 시간지속장치(weight 1 포함)5. 시간지시장치, 6. 구슬신호발생장치7. 타종장치(weight 2 포함)동력연결: 8. 혼천의 북극쪽의 동력연결장치9. 혼천의 남극쪽의 동력연결장치
죽원자의 실학적 가치
 
죽원자는 처음 제작되었을 당시에는 정밀하고 완벽하였으나 대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특성상 시간이 흐를수록 수축과 변형이 일어나게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러한 문제점을 보완하여 1669년에 이민철(李敏哲)과 송이영(宋以穎)이 죽원자를 토대로 다시 제작하게 된다.
 
17세기에 죽원자가 실제로 제작되어 활용되었다면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데 어긋남이 없었을 것이고, 정확한 시각을 짐작할 수 있게 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이롭게 하였을 것이며, 농사짓는 때를 놓치지 않게 하여 민생을 안정시키는데 많은 기여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실학 자료에 대한 연구는 대단히 미흡한 실정이다. 실학자들이 남긴 글은 과학적 소양을 갖춘 전문가의 글이기에 단순 번역자가 접근할 수 있는 글이 아니다. 그리하여 아직도 서고에 방치되거나 연구자들의 무관심 속에 사라져 가고 있는 실정이다. 요즘은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연결하여 통합하고자하는 시도가 여기저기서 활발하다. 이른바 통섭이라는 것이다. 우리 선조는 400여 년 전부터 이미 이 학문적 통섭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그런데 후손으로서 이러한 자랑스러운 학문적 전통을 이어가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책임이 막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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