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멋을 찾아서(1) 태권무 창시자 범지훤(기철)
남도의 멋을 찾아서(1) 태권무 창시자 범지훤(기철)
  • 유현주 수습기자
  • 승인 2016.04.17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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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무예 태권도에 유선의 미를 담다”

▲ 2011 범기철 태권무 공연 광주문화예술회관 작품 '태무정' 중에서
우리가 생을 영위해 가면서 어떤 새로운 분야에 영감을 갖고 일생을 걸어 매진하기란 생각보다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태권도의 강한 힘을 춤의 형상으로 조화시켜 유선의 미로 표현한 무예춤. 무술이 갖고 있는 극한적인 절도와 파괴적인 힘을 진·선·미의 세계로 승화시킨 태권무는 1981년 범지훤 태권도 사범에 의해 만들어졌다.

광주에서 태어난 범지훤 사범은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태권도를 처음 접했다. 태권도 초단 선배가 불량배를 발차기로 넘어뜨리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은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30여 년 간 그는 태권도를 지도하고, 태권무 활성화에 힘쓰고 있다.

“강한 모습의 선배를 보며 ‘나도 선배처럼 강하고 멋진 남자가 되자’고 생각했어요. 그 후 동운동에 있는 김용대 사범에게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했죠”

김해에서 군 장교를 하던 시절. 어느 날 그는 ‘부산 범어사에 하늘을 나는 스님이 있다더라’라는 소문을 듣고 부산으로 향했다. 선무도의 대가로 알려진 범어사 청련암 양익스님이다.

1994년 양익스님을 만난 그는 2년여 간 양익스님의 가르침 아래 ‘금강영관’을 수련했다. 이 시기를 범지훤 사범은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부른다. 양익스님의 가르침을 통해 ‘진정한 힘은 강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움에 있다’는 것을 깨우쳤기 때문이다.

범지훤 사범은 불교에 귀의해 스님이 되고자 했다. 하지만 집안의 격렬한 반대에 그는 범어사에서 지낸지 2년 만에 절을 떠나 서울로 상경했다.

서울에서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던 중 그는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된다. 바로 미국 태권도 대부이자 이소룡과도 교류가 두터운 이준구 사범을 만난 것이다. 이 사범의 제자가 음악에 맞춰 태권도 시범을 보이는 것을 본 범지훤 사범은 영감을 얻었고, 이러한 감격에 이준구 사범의 가르침을 더해 ‘태권무’를 완성시켰다.

“범어사의 양익스님과 이준구 사범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태권도에 홍익사상·풍류정신 등의 전통정신, 그리고 전통 춤을 융합해 완성한 것이 바로 태권무입니다. 두 분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지금의 태권무가 존재하는 것이죠”

▲ 독무 작품 '영원한 빛' 중에서
우리나라 전통 무술인 태권도에 예술성을 가미한 태권무. 초기엔 이를 널리 알리고 싶단 범지훤 사범의 소망과는 다르게 현실은 냉정했다. “태권도로 뭔 춤을 추냐”며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았고, 마침내 태권무는 1981년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1981년 세종문화회관에서 태권무를 처음으로 발표했어요. 그 당시 태권무라는 것 자체가 생소한데다, 평소 피아노나 바이올린 연주만 하던 곳에서 태권도를 한다니까 회관도 섣불리 빌려주지 않더라고요. 처음 시작이 정말 힘들었죠”

주변 여건이 녹록치 않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2000년도쯤 되면 분명 태권무가 격투기를 벗어나 인간성을 가진 예술중심운동으로 승화될 것이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신념 때문일까. 그의 태권무는 80년대에 들어서면서 방송출연, 공연 등을 통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태권무가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하자 이에 대한 문화·예술인들의 격려도 있었다. “음악평론가 박용구 선생과 무용평론가 조동화 선생이 아낌없이 격려를 해주셨죠. 그분들의 격려 덕에 힘이 났어요” 그들의 격려가 없었다면 지금의 태권무는 없었을 것이라고 범지훤 사범은 강조한다.

주변 이들의 격려를 원동력으로 삼아 범지훤 사범은 꾸준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마음 속엔 오로지 ‘태권무의 발전과 보급’에 대한 열정뿐이었다.

▲ 1982 '무궁의 새싹들' 태권무원 연무시범 중에서
도장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태권무 보급에 힘쓰던 그는 문득 태권무를 널리 알리기 위해선 ‘좀 더 쉬운 태권무’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권도를 배우지 않은 사람들도 쉽게 따라할 수 있는 동작이 필요했다.

“처음엔 태권도를 가르치던 아이들에게 태권무도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나중엔 태권도를 한 번 도 배우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태권무 기본기를 9개 정도 추가했죠. 태권무를 모든 사람들이 쉽게 배울 수 있는 운동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그가 태권무를 세상에 내놓았을 당시 태권무는 태권도에 무용의 예술성을 입힌 종합예술이었다. 하지만 동의학연구원 원장인 이기호 박사에게 한의학을 배우고, 미국 보스턴에서 한의학을 태권무에 접목시킨 ‘한기태권무’를 시범 보이게 되면서 태권무는 ‘무대예술’에서 건강관리를 위한 ‘생활체육’으로 변모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건강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요. 침대에 누워서 맞이하는 100살 보다는 건강하게 걸어 다니는 100살이 훨씬 의미 있죠. 이젠 스스로 운동을 통해 건강을 관리해야 할 ‘건강경영 시대’에요. 태권무로 단련을 하면 정말 좋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자신에게 맞는 운동을 해야 해요”

그는 일본 동경국제한국학교에서 태권도를 가르치며 안정된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외국에서의 성공적인 삶과 안정된 기반을 뒤로 하고, 중국, 미국에서 26년간 지도 및 공연활동을 하고 태권무의 국내 보급을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태권무가 이제는 화려한 무대예술이 아닌, ‘생활체육’으로서 자리를 잡아갔으면 하는 작은 바람 때문이었다.

“아무리 명예롭고 돈이 많아도 건강한 육체와 건강한 정신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어요. 앞으로 제 목표는 100세 건강시대를 맞아 제가 가진 조그마한 힘이나마 어르신들이 건강하게 오래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도록 그들을 돕는 것입니다”

▲ 2010 '광주비엔날레' 태권무공연
지금까지 태권도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건강을 알릴 준비를 해왔다는 범지훤 사범. 그는 최근 국내에서의 ‘태권무’의 보급도 ‘노인건강관리’를 시작으로 누구나가 할 수 있는 대체의학 의료운동에 초점을 맞춰놓고 있다. 실제로 그는 광주 빛고을노인복지관 등에서 어르신들에게 태권무를 가르치기도 했다.

또한 그는 ‘건강을 위한 태권무’를 보급하는 것 외에도 태권도정신에 의병정신을 더한 ‘호남의병무예단’을 만들기 위한 준비도 하고 있다. 호연지기를 갖는 젊은이들을 모아 무예를 가르치며 호남의 ‘의병정신’을 고취시키는 것이다.

“광주는 의병도시라 해도 좋을 만큼 많은 의병들이 활약을 했던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활동을 기록한 것이 많이 부족한 현실입니다. 의병의 고장 광주에서 태권무를 통해 의병정신을 고취시키는 것. 그것이 저의 새로운 목표입니다”

그는 지금도 태권무의 보급과 발전, 그리고 새로운 목표인 호남의병무예단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태권무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나날이 바빠지는 그이지만, 이럴 때마다 어김없이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바로 태권무 예술 감독인 린 처칠 교수와, 몇 해 전 작고한 하와이 예술대학 출신의 오카다 마기 교수다. 양익스님과 이준구 사범이 태권무를 만드는데 도움을 줬다면, 린 처칠 교수와 오카다 마기 교수는 태권무의 발전에 큰 도움을 준 사람들이다.

“지금의 제가 되기까지 여러 고난이 있었지만 이러한 고난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어요.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격려와 조언이 있었기에 힘든 시기를 이겨낼 수 있었죠. 요즘도 종종 태권무를 가르쳤던 첫 제자들에게 연락이 와요. 태권도 도장 관장이 되어서도 오히려 ‘저희를 키워주십시오’라고 말하는 제자들을 보면 뿌듯하죠”

▲ 2011 범기철 태권무 공연 광주문화예술회관 작품 ' 태무정' 중에서
최근 경주 골굴사 선무도의 대가 적운 스님과 충주 택견의 인간문화재인 정경화 사범, 그리고 광주 태권무의 범지훤 사범이 연합해 3각 벨트(경주·충주·광주 연계)로 이루어진 한국무예관광 투어를 시작했다.

범사범은 아시아문화전당 개관을 기점으로 앞으로 광주에 많은 국내외 관광객들이 찾아 오기를 바라면서 그는 광주 일원에서의 태권무 상설공연을 시작할 예정이다.

우리나라의 전통 무예인 태권도에 무용의 미적 감각을 더한 태권무를 만들고, 또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반평생을 힘써온 범지훤 사범. 그는 지금의 위치에서 더 나아가 태권무에 의병정신을 더한 호남의병무예단을 만들어 호남의병정신과 광주의 무예춤인 태권무를 널리 알리겠다는 소망을 갖고, 오늘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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