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기록문화유산(12) 고정봉(高廷鳳)
호남기록문화유산(12) 고정봉(高廷鳳)
  • 문희숙 호남지방문헌연구소 연구원
  • 승인 2016.04.14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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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문장으로 이름난 광주의 문인 고정봉

호남지방문헌연구소(책임자: 전남대 국문과 교수 김대현, 062-513-8033)20162월부터 호남한문고전연구실에서 호남지방문헌연구소로 개칭하였으며 새로운 공간으로 이사하여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호남지방문헌연구소는 2002년 설립되어 호남지역의 고문헌 자료를 발굴·조사·정리하고 DB화하며 연구 결과물을 출판하고 있습니다. 고문헌 자료 중에서도 핵심자료인 문집(文集), 지방지(地方誌), 문중문헌(門中文獻)을 중점적으로 조사·연구하며, 연구 결과물은 호남기록문화유산 사이트(www.honamculture.or.kr, www.memoryhonam.co.kr)’에 탑재하고 있습니다. 호남의 귀중한 자료를 집대성하고 DB를 구축할 수 있도록 시민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자문 부탁드립니다.

▲ 고정봉의 묘
 
▲고정봉의 묘비
쇠미해져가는 가문에 책임과 의무를 다한 고정봉
 
수촌 고정봉(水村 高廷鳳, 17431822)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다.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명국(鳴國)이고 초호(初號)는 수촌(守村)으로 했다가 뒤에 다시 수촌(水村)으로 개칭하였다.
 
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 1533~1592)7대손이며 증조는 고가익(高可翼, 1646~1689), 할아버지는 고한정(高漢貞, 1677~1746)이고, 아버지는 고영(高暎, 1712~1783,), 어머니는 금성김기서(金麒瑞)의 딸이다. 1745(영조 19) 1122일에 지금의 광주 남구 이장동 복수마을에서 수촌을 낳았고, 태몽에 상서롭게 떠오르는 해를 품는 꿈을 꾸어 아명을 봉일(捧日)’이라고 하였다.
 
고정봉의 부친은 충의의 가문이라는 집안의 명성과는 달리 선조의 위업이 점차 쇠해지자 고정봉에게 건 기대가 남달랐다. 때문에 고정봉은 주변의 뜻에 부응하기 위하여 만년에까지 학문에 매진하였다. 또한 집안은 비록 쇠미해졌을지라도 어머니가 천연두를 겪지 않아 해마다 천연두가 창궐하면 어머님을 모시고 전염병이 돌지 않는 깨끗한 지역으로 나가 우거하는 등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형제간의 우의가 돈독하였고, 학자로서의 지절도 항상 간직하고 있었다.
 
1798(정조 22) 정조가 시부전의책(詩賦箋義策) 5체의 문제를 광주목(光州牧)에 내려 실시한 전라도 공령과(功令科)에서 장원하고 1800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숙배(肅拜)드릴 때 고경명(敬命)의 후예라 하여 특히 우대하라는 하교가 있었다. 1812(순조 12) 홍문관 교리가 되었고, 이어 돈녕부 도정을 지냈다. 승진을 구하지 않고 학문에 힘썼으며, 효행과 문장이 널리 알려져 판서 김겸(金謙)동국의 안자(顔子)’라 칭하였다.
 
어버이의 뜻에 따라 뒤늦게 대과에 올랐으나 시세(時勢)의 불운으로 끝내 큰 뜻을 펴지 못하고 1822(순조 22) 80세의 생을 마감하였다. 생가는 광주 이장동 590번지이며, 묘소는 등룡산 대지촌(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대지동)에 있다. 문집으로 수촌집이 있다.
 
대문호로서 손색없는 그의 문학작품들
 
고정봉의 생애와 사상이 담겨진 수촌집(水村集)은 세상을 떠난 지 108년만인 19305대손 광수(光洙) 등이 73책 목활자본으로 편집, 간행하였다.
 
1에 시 306, 2에 서() 20, 가장(家狀) 5, 유묵서(遺墨書) 2, 3에 소() 3, (시의(詩義) 1, () 3, 4에 서() 2, () 9, () 3, (() 1, 5에 잡저 21, 부록으로 제문·행장·묘갈명·묘지명, 6·7에 어제경서의의조대(御製經書疑義條對경의조대유생록(經義條對儒生錄경신방목(庚申榜目기사관록(己巳館錄임신당록(壬申堂錄) 등이 편차 수록되어 있다.
 
수촌집 권4에는 뛰어난 문장으로 저술한 여러 기문과 설이 모아져 있는데 그 가운데 백결선생삼변설(百結先生三變說), 관성자기(管城子記), 저선생기(楮先生記), 담파고노비장기(淡破枯奴婢庄記)는 매우 주목할만한 작품들이다.
 
백결선생삼변설(百結先生三變說)은 한미한 선비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이웃집 백결선생과의 대화를 글의 소재로 이끌어 와 궁색한 살림살이에 대해 우스꽝스럽게 풀어가는 내용으로, 당시 동쪽 이웃에 사는 한미한 선비의 말을 푸념 섞인 고통을 들어보면, “‘라는 놈이 해진 솜옷과 구멍 난 겨드랑이에 둥지를 틀어 날카롭고 독 있는 부리로 사람의 몸을 깨물고 피를 빨아 변고를 일으켜 나와 같이 여러 군데 기워 입은 자에게 날마다 부스럼을 긁고 번번이 흉터가 나게 하여 지탱할 수 없게 하니 어찌하여 이 는 멀쩡한 옷을 걸치지도 못한 아둔하며 깡마른 자를 몹시 미워하고, 화려한 옷으로 몸을 치장하지 못한 구부정하고 못생긴 늙은이를 몹시 싫어하여, 몰래 비웃고 기만하며 떼거지로 몰려들어 이다지도 곤란하게 한단 말인가.” (占巢穴於弊袍破縫之掖, 以利喙毒嘴, 咬人軆吮人血, 作變乖常, 使我衣百結者, 日搔疴癢, 動成瘡痏, 支吾不得, 豈是虱也偏惡樸鈍枯朽者之不能以完衣庇軆, 偏厭蹇連老醜者之不能以好衣章身, 窃嗤之欺凌之, 紛集作變而困之者乎!)라고 할 정도로 이에게 받는 스트레스를 잘 토로했다 볼 수 있다.
 
저선생기(楮先生記)는 관성()과 함께 일을 하여도 늘 관성에게 가려져 조명을 받지 못하는 자신들의 존재에 불만을 토로하자 이를 들어주며 지필연묵(紙筆硯墨)의 조화가 있어야 일이 완성되어짐을 결론으로 이끌어가는 자문자답식의 내용이다.
 
담파고노비장기(淡破枯奴婢庄記)는 홍로부인을 잃고 시름하던 고죽선생에게 담파고(담배)가 와서둘 다 연로하니 함께 밥을 해먹자 제안하며 자신에게 있는 두 노비 철산(鐵産), 석산(石産)과 여자종 익덕(翌德) 세 사람을 불러다 궁벽한 고죽선생의 살림에 불을 일으키는 일을 맡기고 또 담파고가 꿈을 속에서 수인씨(燧人氏)가 선생을 화정여(火正黎 불담당 관리)의 관직에 제수하였으니, 선생께서는 화식(火食)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니 마침내 담파고와 세 노비 철산석산익덕과 함께 생활해간다는 내용으로 화로와 담뱃대와 담배를 의인화하여, 우화적으로 흥미롭게 내용을 전개해나가는 작자의 필력을 엿볼 수 있는 글들이다.
 
위에서 언급한 작품들은 가전체(假傳體)형식으로 표현의 묘미는 있으나 주제의식은 두드러지지 않아 선문답(禪問答) 같은 내용적 특성을 보이고 있으나 표현이 섬세하고 어구가 화려하여 문학적으로 매우 가치가 있다.
 
이러한 가전체(假傳體) 문학은 당나라 문인 한유의 <모영전>, 신라시대 설총의 <화왕계> 등에서 유래되어 고려 중엽부터 창작된 양식으로서, 사물을 인물처럼 의인화하여 그 가계(家系)와 생애 및 공과(功過)를 전기 형식으로 서술한 한문학 양식이다. 따라서, 실전(實傳)에 상대되는 뜻으로 가전이라 한다. 가전속의 사물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 나름의 개성과 기질, 욕구를 가지고 희비와 성쇠를 겪으며 살아가는 것으로 그려져 있어 물건을 의인화하여 경계심을 일깨워 줄 목적으로 사람의 일생을 압축하여 서술한 교술문학(敎術文學)인 것이다.
 
우리 고전문학에 있어 대표적인 가전으로는, 임춘의 <국순전(술 의인화)><공방전(돈 의인화)>. 이규보의 <국선생전(술 의인화)><청강사자현부전(淸江使者玄夫傳 거북이 의인화)>. 이곡의 <죽부인전(竹夫人傳 대나무 의인화)>. 이첨의 <저생전(楮生傳 종이 의인화)>. 석식영암의 <정시자전(丁侍者傳 지팡이 의인화)> 등이 있다. 이들처럼 수촌의 문장은 그동안 세상에 드러나지 않아 조명을 받지 못하였으나 독자들이 흥미 있게 읽고 교훈을 찾는데는 손색이 없다 하겠다.
 
▲『수촌집(水村集)』
 
수촌집의 자료적 가치
 
고정봉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자 성리학자인 고경명의 7대손이다. 그의 성장과 활약시기가 정조순조 때의 문민정치와 만나 고유의 유교적인 도학과 문장 그리고 충절이 함께 잠재된 저술을 이루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저술의 양상은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유교사상에서 근원한 것이다.
 
파징(波澄) 윤영구(尹甯求)는 수촌집의 서문에서 선생의 도학과 문장을 추앙한 끝에 논평하기를 그 시는 침중(沈重)하면서도 강개(慷慨)하여 세상을 구하려다 얻지 못한 탄식이 있었고, 그 문()은 강명(剛明)하면서 치밀하여 풍속을 깨우치거나 약한 이를 일깨워주는 풍도가 있으며, 소차(疏箚)에 있어서는 임금을 성군으로 만들고 백성들에게 은택을 끼치는 데 정성을 쏟았으니 보잘 것 없는 후생으로서 그 학문에 대한 깊고 얕음을 논할 바가 아니다라고 찬술했다.
 
수촌집은 단편적이나마 조선후기 호남 문인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는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고정봉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가 충의 가문의 후손으로 정조의 주목받았던 연관성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다수의 운문과 산문 등을 통해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현실주의적으로 작품에 담아내고, 상소문을 올려 당시의 여러 폐단을 지적하고 고쳐지기를 바라는 일념으로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내는 등 다양한 층위의 내용을 글로 승화시켜 문학으로 세상에 알려졌으니 그의 문학적, 역사자료적 성과를 높이 평가하며 좀 더 심층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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