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기록문화유산(11) 두류단(頭流壇)
호남기록문화유산(11) 두류단(頭流壇)
  • 나상필 호남지방문헌연구소 연구원
  • 승인 2016.04.07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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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에 새겨진 호남 유학의 마지막 발자취 지도(智島) 두류단(頭流壇)

‘호남지방문헌연구소’는 2016년 2월부터 ‘호남한문고전연구실’에서 ‘호남지방문헌연구소’로 개칭하였으며 새로운 공간으로 이사하여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호남지방문헌연구소는 2002년 설립되어 호남지역의 고문헌 자료를 발굴·조사·정리하고 DB화하며 연구 결과물을 출판하고 있습니다. 고문헌 자료 중에서도 핵심자료인 문집(文集), 지방지(地方誌), 문중문헌(門中文獻)을 중점적으로 조사·연구하며, 연구 결과물은 ‘호남기록문화유산 사이트(www.honamculture.or.kr, www.memoryhonam.co.kr)’에 탑재하고 있습니다. 호남의 귀중한 자료를 집대성하고 DB를 구축할 수 있도록 시민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자문 부탁드립니다.

 
▲ 두류단 전경
 
돌에 새겨진 호남 유학의 마지막 발자취 지도(智島) 두류단(頭流壇)
 
금석문은 말 그대로 철이나 청동 같은 금속성 재료에 기록한 금문(金文)과 비석처럼 석재(石材)에 기록한 석문(石文)을 합하여 일컫는 말이다.
 
호남 지역은 비석(碑石)이 많은 곳으로 오래 전부터 비석의 숫자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남아 있다. 이들 비석은 묘비(墓碑)와 탑비(塔碑) 능묘비(陵墓碑) 외에도 신도비(神道碑) · 유허비(遺墟碑) · 기공비(紀功碑) · 송덕비(頌德碑) · 효자비(孝子碑) · 사비(祠碑) 등의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다. 이 비석은 그 비문의 내용이 알려 주는 역사적 사료로서의 금석문의 가치나 서체가 보여 주는 서예사적 가치 그리고 비석 양식의 변천을 통해 미술사적 가치를 함께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형식적인 틀에 있는 비석이 아닌 자연의 돌에 새겨진 석문이 호남의 아름다운 섬 군락 중 신안 지도에 있다.
 
지도(智島)는 섬의 지형이 지(智)자 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지도라 불렀으며 그 명칭은 『신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나타난다. 섬이라고 하면 내륙과 단절되어 있어서 사람들의 수준이 낮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섬이라는 공간은 특히 유배인들에게 새로운 환경을 통해 내륙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다양한 것들이 주어진다. 우리나라 서남해의 수많은 섬 가운데 대표적인 유배지로 지도, 임자도, 흑산도, 우이도를 들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지도가 조선 시대에 식자(識者)들이 유배되어 신안의 많은 섬들 중 유학적인 전통과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지도는 전라남도 무안 서쪽에 있는 섬이다. 현재 행정구역상 신안군 지도읍의 본도이며 1975년 무안군 해제면 내륙과 연결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나주목에 속해 있다가 1896년에 ‘섬으로 섬을 다스린다’는 고종의 도서 정책에 의해 지도군(智島郡)이 설군(設郡)되었다. 이때 하나의 군(郡)에 하나의 향교를 설치한다는 원칙에 따라 지도에도 향교가 조성되어 섬 지역에 흔치 않은 유학적 기풍에 더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14년 이후 무안군에 속하였고, 1969년 무안군에서 섬 지역이 분리되어 새롭게 신안군이 창군되면서 신안군에 편입되어 1980년 지도읍으로 승격하였다. 이런 단절된 섬 지역이 유배인이었던 김평묵으로 유학의 향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였다.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黙)은 경기도 포천 화산면 시우촌 출신이며 혼돈의 시기였던 조선말기 유림의 대표적인 거장이다.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과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에게 수학하였고 동문으로는 유중교(柳重敎), 최익현(崔益鉉)등이 있다. 스승인 이항로의 이주기객론(理主氣客論)과 존왕양이(尊王攘夷)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아 실천하고 위정척사를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이만손 등이 올린 영남만인소를 격려하는 편지를 보낸 것과 경기도 유생을 위해 상소문을 지은 것, 강원 유생 홍재학 등이 올린 상소의 말미에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 것 등의 이유로 조정에 미움을 받아 지도로 유배되어서 지도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렇게 위정척사의 일로 당시의 의론과 어긋나게 되어 지도로 유배와 해배를 반복하며 4년의 세월을 지도에서 보냈다. 이때 호남의 유림들은 지도에 유배되어 있는 김평묵에게 끊임없이 가르침을 청하고 김평묵 자신도 학문에 대한 끊임없이 정진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 두류단실기 속 두류단을 중심으로 섬 배치도
 
조선 유학의 마지막 성지 두류단(頭流壇)
 
신안군 지도읍 감정리 백련동에는 두류산(지도읍 감정리 산 216-9)이 있는데 지리산의 옛 이름인 두류산과 이름이 같다. 그래서 지리산을 동두류(東頭流)라고 하며 지도의 두류산을 서두류(西頭流)라고 한다.
 
서두류산의 정상부에 세워진 두류단은 본래 1720년경 주자(朱子, 1130-1200),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 세 분을 모시는 정자를 짓고 제향을 지내왔던 곳이라 전한다. 그 후 1914년 호남 유림들이 선현들을 기리기 위해 전라도 지방의 학문과 사상에 있어서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던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黙, 1819-1891) 세 분을 단비(가로 33cm, 세로 68cm)로 모시고 ‘삼현단(三賢壇)’ 이라 불렀다.
후에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과 중암 김평묵의 제자였던 지도 출신의 본와(本窩) 나유영(羅有英) 선생을 단비로 모시게 되면서 ‘오선생단(五先生壇)’ 또는 ‘오선비(五善碑)’라 불려지고 있다.
 
두류단 주변에는 돌담이 둘러쳐 있고, 오선비의 앞쪽 공터에는 두류단의 유래를 기록한 두 개의 비 기우만(奇宇萬)이 지은 ‘두류산삼선생단기(頭流山三先生壇記)’와 최익현의 아들 최영조(崔永祚)가 지은 ‘두류사현단비(頭流四賢壇碑)’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두류단 주변에는 배향 인물인 최익현의 글씨인 ‘대명일월 소화강산(大明日月 小華江山)’, 중암의 제자들 이름이 새겨진 ‘지재여운(智齋餘韻)’, 이곳이 중암 김평묵의 유허지임을 상징하는 ‘중암유탁(重菴遺躅)’, 유학의 적통을 상징하는 글씨 ‘주기장예 정일주직(周幾張豫 程一朱直)’ 등 화서 이항로의 학통을 반영한 글씨가 현재까지 온전한 형태로 잘 보존되고 있다.
 
▲ 대명일월소화강산
 
▲대명일월 소화강산(大明日月 小華江山)
두류단의 뒤쪽에 경사진 중간쯤에 조성되어 있다. 지도의 바다를 바라보는 듯 평평한 넓은 바위 앞면에 세로로 글씨가 새겨져 있다. 우측에 ‘대명일월 소화강산(大明日月 小華江山)’ 이라고 새겨져 있고, 좌측에 ‘최익현서(崔益鉉書)’라고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가 유구한 역사를 지닌 정통성 있는 국가임을 강조하는 의미로 최익현의 스승인 화서 이항로의 사상이 담겨있다.
 
▲ 지재여운
 
▲지재여운(智齋餘韻)
최익현의 글씨보다 조금 더 위쪽에 조성되어 있다. 긴 모양의 바위 위쪽에 ‘지재여운(智齋餘韻)’ 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고 아래 쪽에는 지도에 유배 온 중암 김평묵에게 학문을 익힌 제자 김병렴(金秉濂), 박임상(朴琳相), 나유영(羅有英), 임행재(任行宰), 박기룡(朴淇龍), 김양운(金陽運), 박현장(朴顯章), 김사왕(金似王), 김봉래(金鳳來) 9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지재(智齋)’는 이 곳이 김평묵이 지도에서 후학을 육성하던 서당과 같은 곳이라는 의미이고 ‘여운(餘韻)’은 그 남겨진 제자들이라는 의미이다. 바위 오른쪽에 ‘정유 오월(丁酉 五月)’이라고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1897년에 생겨진 것이고 바위의 위쪽 뒷면에 ‘임행재서(任幸宰書)’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 중암유탁
 
▲중암유탁(重菴遺躅)
두류단으로부터 뒤쪽 산길을 따라 올라가는 산정상 부분에 조성되어 있다. 현재 헬기장이 조성되어 있는 인근 바위에 새겨져 있다. 아래 부분 오른쪽 ‘나유영각(羅有英刻)’이라 새겨져 있고 왼쪽에 ‘최익현 류기일서(崔益鉉 柳基一書)’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중암유탁(重菴遺躅)’ 이라는 글씨는 중암 김평묵의 제자였던 나유영이 중암이 세상을 떠난 1년 후에 면암 최익현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는데 최익현은 중암의 유배지였던 지도에서 중암 김평묵의 숭고한 정신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염려하여 제자였던 나유영에게 명하여 글씨를 새기도록 지시한 것이다. 이 글씨는 두류단의 유적 중에 가장 빠른 시기이다.
 
▲ 주기장예 정일주직
 
▲주기장예 정일주직(周幾張豫 程一朱直)
‘중암유탁(重菴遺躅)’ 이라는 글씨와 같은 바위의 왼쪽에 ‘주기장예 정일주직(周幾張豫 程一朱直 - 주돈이의 기밀, 장재의 예비, 정자의 전일, 주자의 방직)’ 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 글은 유학의 적통을 상징하는 글자로 원래 경기도 포천 창수면 수동리에 스승인 화서 이항로가 제자인 최익현, 유기일 등을 데리고 와서 암각에 쓴 것인데 최익현이 스승인 이항로를 항상 가슴에 새기고 제자들이 그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는 뜻으로 나유영에게 지시하여 조성한 것이다.
 
▲ 두류단실기책
 
두류단과 관련된 저서로 『두류단실기(頭流壇實記)』가 있다. 이것은 신안군 지도읍 백련동 두류산에 조성되어 있는 두류단과 관련된 여러 가지 기록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현재는 지도향교에서 소장하고 있다. 두류단실기는 두류단의 조성과 제를 지내는 과정에 참여한 185면의 유림들의 명단과 여러 가지 사실들을 기록해 놓은 실기(實記)의 성격이 강하다. 책 표지에는 『두류산사책(頭流山史冊)』라고 적혀있으나 책 안에는 각 면마다 『두류산실기』라는 명칭으로 기록되어있다. 두류산실기는 김평묵의 지도유배생활 당시 문도들과 그와 교류했던 호남의 유림들이 두류산에 제단을 만들고 비를 세워 제를 올리게 되는 일련의 과정에서 있었던 일들을 1904년 기우만의 ‘두류산청금계서(頭流山靑襟契序)부터 1925년 김원표(金元杓)의 ’제두류계안후(題頭流契案後)에 이르기까지 시기별로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과거 ․ 현재 ․ 미래가 담긴 역사적 장소의 보존 필요성
 
두류단은 지도에서 대표적으로 주목할 만 한 유적지인데 특히 김평묵과 관련된 유적지로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유학사상가의 명맥이 섬마을 지도에 이어져 왔음을 보여주는 조선 유학의 마지막 성지이다. 두류단 주변에는 김평묵, 최익현 등과 관련된 바위 글씨들이 남아 있고 두류단 앞 지도 바다의 풍광은 매우 아름답다.
 
특히 이곳은 위정척사사상을 주장했던 유학자들의 혼이 담겨 있는 유학의 성지라고 할 수 있으나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으면 유서 깊은 장소로 보기 어려워 스쳐 지나갈 수 있다. 두류단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우리 선조들의 사상과 얼이 담긴 곳으로 미래의 좌표이자 후손에게 물려줄 혼이 담긴 유산이 될 수 있으니 잘 조성하여 보존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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