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 봄을 데려 왔는가
누가 이 봄을 데려 왔는가
  • 문틈 시인/시민기자
  • 승인 2016.04.06 09: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봄이 왔다고 동네방네 외지 않아도 다 안다. 바구니를 옆에 끼고 밭둑에서 나물을 캐는 처자들과 그 주변에서 어른거리는 아지랑이를 보면 봄이 완전히 이 나라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모두 안다. 봄이 오기를 무척이나 기다렸다.

어찌 나뿐이랴. 푸른빛이 물감처럼 삐죽삐죽 솟아나와 들판, 산 언덕, 길섶을 칠해놓은 저 찬연한 색채를 보고 싶어서 날마다 멀리 영(嶺) 너머를 바라보곤 했다. 이 부드러운 바람결, 보드라운 하늘빛, 저 하늘 높이 올라가 지줄 대는 종달새, 숲속에서 갖가지 울음소리로 서로를 부르는 새, 새들, 막 피어난 꽃들을 찾아다니며 무슨 긴한 소식인가를 일일이 전하는 나비들, 샛강에서 물놀이를 하는 오리떼, 알 껍질을 깨뜨리고 나온 햇병아리, 그리고 산골짝에서 흘러내려오는 맑은 물소리.

봄이 보따리를 풀어놓자 세상이 갑자기 빙하기를 끝내고 지구의 역사를 새로 시작하는 것만 같은 푸른 풍경이 온 천지에 거대하게 전개된다. 빙하기가 끝난 내 앞에 나타난 이 봄은 무슨 말로 어떻게 하든 우주가 내게 보낸 생명의 선물이다. 이 선물꾸러미를 펴보는 기쁨으로 살아 있다는 감격이 온몸에 전율한다.

누구에겐가 이 감격을 공유하고 싶어서 몇 년 만에 뜬금없이 영암에 사는 10대 시절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보게나. 거기도 봄이 한창이겠지. 월출산도 차림새가 달라지겠네.” 어쩌고 말을 걸었더니 이 친구가 말을 얼른 끝내자는 투로 “요즘 바빠. 논 갈러 가야 돼.”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흙을 갈아엎을 때 나는 흙냄새가 훅, 하고 내 코에 끼쳐온다.

그러고 보니 살진 흙냄새를 맡은 지 몇몇 해가 되었는가. 황소가 끌고 가는 쟁기가 논흙을 갈아엎을 때의 그 흙냄새, 갈아엎은 흙에서 토막 난 흰 뿌리를 찾아내 입에 넣는 맛도 상큼했거니. 봄이 얼어붙은 겨울을 녹이고 이렇게 삼천리강토에 찾아오다니, 정말 새봄을 열렬히 환영한다.

나는 집안 대청소를 하고 방안에 두었던 화분들도 창가로 내놓았다. 들여다보니 뱅갈고무나무, 센실베리아 화분에도 새잎들이 돋아나올 기미다. 햇볕을 잘 머금으라고 잎새 하나하나를 물수건으로 닦아준다. 그리고는 그것들더러 들으라고 말한다. “봄볕을 잘 받아먹어라. 그리고 쭉쭉 뻗어 올라라.” 속삭임 소리가 마치 내 스스로에게 하는 말 같기도 하다.

봄은 이 나라 어느 후미진 곳도 빼놓지 않고 왔다. 봄이 왔다는 표시를 곳곳에 확실히 해놓았다. 밤중에 동네 아이들이 휘갈겨 써놓은 담벼락의 낙서처럼. 아니다, 봄은 부활을 선언한다. 죽은 생명들이 다시 살아나는 일을 현현하고 있다. 자연의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모든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봄의 재현은 그저 계절의 오고 가는 흐름쯤으로 볼 일이 아니다. 죽음과 재생이 변주하는 우주의 질서 앞에 나도 그 어디쯤에 맞물려 있음을 보여준다. 나 같은 이 일개 생명이 우주의 작동에 연결이 되어 있다. 신비스러운 일이다. 이 신비를 뉘라서 그 처음을 알아내겠는가.

어느 틈에 산수유가 없는 듯 있는 듯 피어나더니 목련, 개나리, 라일락, 진달래, 벚꽃, 철쭉들이 다투어 피어난다. 꽃들의 사열이 시작되었다. 감탄사를 한 가마니쯤 쏟아내도 이 화려한 장관을 그릴 수 없을 터. 마음 같아선 모든 이 나라에 피어난 꽃송이 하나마다 감탄사를 하나씩 붙여주고만 싶다.

나는 알지 못한다. 누가 이 기적을 일으키는 봄을 우리에게 데려왔는지. 하지만 나는 안다. 봄이 와서 벌이는 갖가지 일들을. 봄이 하는 일을 보고 있으면 불행조차도 나름대로 행복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봄은 길게 말하지 않는다. 성당 제대의 촛대에 불을 켜는 복자처럼 풀, 나무, 산 어디에나 파란 불을 켠다.

봄날은 누구나 작은 일에도 크게 행복할 일이다. 이 세상에 목숨을 얻어 나와 이보다 더한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다. 봄 들판으로 나가 엎드려 감사할 일이다. 아, 시방 내 몸에선 들판을 파랗게 칠한 연한 물감 냄새가 난다.

최신 HOT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