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기록문화유산(10) 호남의 유기문학가
호남기록문화유산(10) 호남의 유기문학가
  • 김순영 호남지방문헌연구소 연구원
  • 승인 2016.03.31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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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호남의 대표적 유기문학가, 송병선과 양회갑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은 19세기 후반의 뛰어난 유기문학가(遊記文學家)이다.

19세기 호남의 유기문학가 송병선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은 19세기 후반의 뛰어난 유기문학가(遊記文學家)이다. 그는 22편에 이르는 유기문학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 호남 유산기는 『연재집(淵齋集)』권21, 22에 실려 있다. 그는 서석산(무등산), 지리산, 백암산, 덕유산, 황악산, 가야산, 월출산, 천관산 등 호남의 산을 유람하고 유산기를 지었다. 송병선은 유산기뿐만 아니라 유기 작품도 많이 저술하였는데, 쇠망하는 나라에 대한 안타까움과 답답함이 그로 하여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게 한 것 같다. 이 중 <서석산기>는 1,000여 자로 장편의 유산기는 아니지만, 무등산 곳곳의 모습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송병선의 유기문학가적 면모를 보여준 작품이라 하겠다.
 
송병선은 충청남도 회덕 출생으로 전라북도 무주에 서벽정(棲碧亭)을 짓고 도학을 강론하였는데, 이때 호남의 여러 산을 유람하고 유산기를 지었다. 그는 동생 심석재(必石齋) 송병순(宋秉珣, 1839∼1912)과 함께 구한말, 절의와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고,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시정 개혁과 일본에 대한 경계를 건의하였다. 뒤에 그는 다시 대궐에서 고종에게 상소하려하였으나 경무사(警務使) 윤철규(尹喆圭)에게 속아 일본 헌병대에 의해 고향으로 강제 이송당하고,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해 음독 자결했다. 사후에 의정(議政)에 추증되고 󰡐문충(文忠)󰡑이란 시호가 내려졌으며, 광주 만주사(晩洲祠)에 제향되었다. 송병선은 호남 유산기 외에도 전국의 산을 돌아다니며 많은 유산기를 남겨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유기문학가 중에 한 명으로 손꼽힌다. 그의 문집인『연재집』은 53권 24책 목판본으로 동생 송병순이 1906년에 송병선의 시문을 모아 편집하고 연보와 행장을 써서 부록으로 첨부하여 간행하였다. 그의 시문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에서의 유학자들의 면모와 자세를 엿보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송병선은 1866년부터 1902년까지 유기 작품을 꾸준히 창작하였다. 『연재집』 권19~22까지 4권에 걸쳐 유기 작품들이 실려 있으며, 작품은 유람한 시기 순서대로 수록되어 있다.
 
송병선이 남긴 유기작품 22편 중 호남지역 관련 유기는 <적벽기>와 <유승평기>를 합하여 총 9편이 전하고, 영남지역 관련 유기는 <두류산기>를 포함하여 총 8편이 현전하고, 충청지역 관련 유기는 <유황산급제명승기>, <유금오산기>, <유화양제명승기> 총 3편이 있다. 유기작품 중 산을 유람하고 쓴 것을 유산기(遊山記)라 하는데, 송병선은 총 유산기 13편을 남겼다. 이 중 호남지역 유산기는 <지리산북록기>, <서석산기>, <백암산기>, <두솔산기>, <변산기>, <덕유산기>, <유월출천관산기> 7편이 있고, 영남지역 유산기는 <황악산기>, <수도산기>, <가야기>, <금산기>, <두류산기> 5편이 전하며, 충청지역 유산기는 <유금오산기> 1편이 있다.
 
<지리산북록기>에서 송병선은 호남 유람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유람을 좋아하여 지방에 있는 명승은 대략적으로 거의 보았으나 유독 호남은 유람하지 못했다. 기사년 2월에 드디어 남원에 도착하여 친척 경홍 안종구(安鍾龜) 집에 방문하였다. 경홍이 지리산북록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내가 들었으나 마음이 시원치 않아 안시용, 시묵과 약속하고 함께 갔다.[余少好遊 方內名勝 略約已觀 而獨於湖南未也 歲己巳大壯之月 遂行到南原 訪安戚景洪 鍾龜 景洪盛說智異北麓 余聞之 不覺爽然 約安時容,時默同往. -宋秉璿, 『淵齋集』, 권21, 「雜著」, <智異山北麓記>.]
 
송병선은 어려서부터 유람을 좋아하여 지방의 많은 명승지를 유람하였다. 그러나 그는 유독 호남만 유람하지 못함을 늘 아쉬워했고, 그의 나이 34살(1869)에 남원 지리산에서부터 호남 유람을 시작하였다.
『연재집』의 <연보>에 따르면, 1869년 2월에 호남으로 유람을 떠나 지리산북록을 관람하고, 김덕령 장군의 비석이 있는 창평의 충효리, 서석산, 적벽강, 장성, 변산, 정읍을 유람하였으며, 5월에 덕유산을 유람하였다. 이때 그가 남긴 유산기 중 <지리산북록기>와 <덕유산기>에만 유람의 시기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지리산북록에서 서석산, 장성, 변산, 정읍까지를 이어 유람하고, 5월에 덕유산을 따로 유람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그는 1898년 3월 영암 월출산과 장흥 천관산을 유람하고 <유월출천관산기>를 남겼다.
 
▲정재(正齋) 양회갑(梁會甲, 1884~1961)이 남긴 호남 유산기는 그의 문집 『정재집(正齋集)』권8에 실려 있다.
 
20세기 호남의 유기문학가 양회갑
 
20세기 호남의 대표적 유기문학가로는 정재(正齋) 양회갑(梁會甲, 1884~1961)이 있다. 그가 남긴 호남 유산기는 그의 문집 『정재집(正齋集)』권8에 실려 있다. 양회갑은 서석산(무등산), 월출산, 천관산, 만덕산, 종고산, 유달산, 팔영산 등 호남의 산을 유람하고 여러 편의 유산기를 남겼다. 그 중 <서석산기>는 1,850여 자의 글로 1935년에 정기(鄭琦), 김전(金錪), 김성옥(金聖玉) 외 정씨 집안의 여러 사람들과 함께 무등산을 유람하고 기록한 것이다. 유산(遊山)의 경로를 보면 화순의 적벽과 물염정에서 노닐고, 규봉암과 광석대, 삼존석을 거쳐 천황봉에 올랐다. 그리고 입석대로 내려와 지장암에서 쉬고, 다시 입석대에 올라 화순으로 내려왔다. 한편, 천관산과 만덕산은 양회갑이 1939년에 영남의 벗들과 함께 유람하였는데, 양회갑의 유산기 작품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유산 활동을 통해 영호남 문인들의 교류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양회갑은 1884년 화순군 이양면 초방리 집에서 송병선의 문인이었던 양재덕(梁在德)의 아들로 태어났다. 6세부터 조부에게 수학하였는데, 이때에 능히 <천자문>을 읽었다 한다. 1905년 송병선에게서 수학하려 하였으나, 그가 졸하자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과 월파(月坡) 정시림(鄭時林) 등에게서 배웠다. 양회갑은 1961년 78세로 졸하였다. 양회갑의 유산기에는 송병선에 대한 내용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가 호남의 여러 산을 유람하고 유산기를 남긴 일은 송병선 작품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호남 유산기를 저술한 작자들은 대부분 호남 출신의 문인들이다. 다산 정약용, 송병선과 같은 인물들은 호남 출신은 아니지만 호남에 거주하면서 호남을 유람하였다. 호남 유산기의 작자 중 여러 편의 유산기를 남겨 주목받는 인물들이 있는데, 19세기의 송병선, 20세기의 양회갑이 가장 대표적인 문인이다. 송병선은 자신이 거주했던 전라북도 무주를 중심으로 전라남북도에 소재한 무등산, 백암산, 변산, 덕유산, 도솔산, 월출산, 천관산 등을 유람하였다. 양회갑은 자신의 고향인 전라남도 화순을 중심으로 전라남도에 위치한 무등산, 월출산, 천관산, 만덕산, 종고산, 유달산, 팔영산 등을 유람하였다. 이들이 남긴 유산기에는 호남 산과 그 주변 지역의 명승지, 그리고 호남의 많은 인물들에 대한 정보가 담겨져 있다.
송병선, 양회갑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호남기록문화유산 사이트(http://memoryhonam.co.kr/) 내 <호남문집>과 <호남인물검색시스템>에서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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