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기록문화유산(9) 문중문헌
호남기록문화유산(9) 문중문헌
  • 정옥경 호남지방문헌연구소 연구원
  • 승인 2016.03.24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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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류씨 내력과 구례 운조루(雲鳥樓) 이야기

호남지방문헌 연구소에서는 이 지면을 통하여 호남 지역과 관련된 기록문화 유산을 계속 소개하고 있다. 이번에는 문화류씨의 내력과 그의 종가인 구례 운조루의 고문헌 및 민속자료에 대한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류씨(柳氏)는 원래‘류’라는 성이 대대로 이어져 왔으나 1996년 10월부터 성씨에도 두음법칙이 적용되어 유씨로 불려졌다. 이후 논란이 되어 오다가 2007년에 성씨에는 ‘두음법칙 예외’결정이 내려져 다시 류씨로 부르고 있다.

▲ 문화류씨문헌1


문화류씨(文化柳氏)의 시조는 류차달(柳車達)이다. 그는 고려 개국 초 대승(大丞)을 지낸 당시 유주(儒州)(현 황해도 신천군)의 호족이었다. 유주는 다시 문화현(文化縣)으로 개칭되었으며 이후 후손들이‘문화’를 본관으로 삼았다. 󰡔문화류씨세보(文化柳氏世譜)󰡕를 살펴보면, 시조 류차달로부터 6대까지는 과거시험에 급제자가 없어 분파가 이루어지지 않고 단계(單系)의 가승으로 유지되었다. 7대 류공권(柳公權)이 급제하여 이후에 여러 지파가 형성되면서부터 명문가로 성장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류공권 이후 분파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8대 상성공(尙書公) 류언침(柳彦沉)과 복야공(僕射公) 류택(柳澤)을 거점으로 이후 크게 14개 지파로 분파되었다. 상서공 후대에서는 시랑공(侍浪公), 문숙공(文肅公), 하정공(夏亭公), 장령공(掌令公), 곤산군(崑山君), 문평군(文平君) 등 6파로 나누어 졌다. 복야공의 후대에서는 지후사공(祗候使公), 좌상공(左相公), 검한성공(檢漢城公), 정숙공(貞肅公), 판사공(判事公), 수사공(水使公), 부윤공(府尹公), 충경공(忠景公) 등 8파로 나누어졌다.
▲ 문화류씨문헌2


문화류씨 족보 중 1423년에 간행된 ‘영락보(永樂譜)’는 우리나라의 최초의 족보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서문만 현존하고 있고 현존하는 가장오래된 문화류씨 족보는 1565년에 간행된 ‘가정보(嘉靖譜)’이다. 
 
호남 지역에서 세거지를 형성하고 있는 지파는 주로 하정공파, 곤산곤파, 지후사공파, 좌상공파, 검한공파, 정숙공파, 충경공파 등 이다. 이 중에 특히 전남 창평에 처음 입향한 인물은 지후사공파의 후손인 류문표(柳文豹)이다. 류문표의 아버지는 생원 류인흡(柳仁洽)이며 사육신의 한 사람인 류성원의 재종형이다. 단종 때 사육신의 화를 당하여 1456년에 전북 순창으로 내려와 살았는데 그때 류문표의 나이 네 살이었다. 이후 1470년에 처가인 담양 창평 얼그실(유곡리) 마을로 이거하여 500여 년 동안 세거지를 이어오고 있다. 후손으로는 중종 때의 명신인 정간공(靖簡公) 석헌(石軒) 류옥(柳沃) 등이 있다. 현재 전남 담양군 창평면 해곡리에 있는 문화류씨 종가인 와송당(臥松堂)은 전남 문화재자료 제 192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로 이 와송당은 송강 정철이 신방을 차린 곳으로도 유명하며 송강의 막내아들 기암 (畸庵) 정홍명(鄭弘溟)이 쓴 「유촌외가구업중수상량문(維村外家舊業重修上樑文)」이 걸려있다.

▲ 운조루외부전경
운조루가 자리 잡고 있는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마을에 처음 입향한 인물은 곤산군파의 후손인 류이주(柳爾胄)(1726-1797)이다. 대대로 문화류씨 곤산군파가 세거지를 형성한 곳은 대부분 경상도 지역이었다. 경북 대구 태생인 류이주가 이곳 전남 구례 토지면 오미리 마을에 자리를 잡은 것은 전남 승주(현 순천) 낙안군수로 재직하면서 부터이다. 이 오미리 마을은 앞쪽에는 섬진강이 흐르고 뒤쪽에는 지리산이 능선을 이루고 있어 실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형적인 명당자리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마을이다. 류이주는 이 곳이 명당자리임을 알고 장정 수 백 명으로 하여금 살터를 닦게 하여 ‘운조루(雲鳥樓)(구름 속에 새처럼 숨은 집)’라는 99칸의 집을 짓고 그 일가들을 모여 살게 하였다.

운조루는 조선 중엽(1776)에 건립되어 200여 년 동안 10대째 이어오고 있는 문화류씨 종가이며, 조선시대 호남지방의 유명한 양반 가옥이다. 이곳에는 전적(典籍)류가 총 326종 801책이 전해오고 있다. 이 중에 1967년 일부인 32종 145책을 성균관 대학 중앙도서관에 기증 하였다. 이 전적은 류이주 때부터 그의 자손인 류억(柳億)(1796-1852), 류제양(柳濟陽)(1846-1922), 류형업(柳瑩業)(1866-1944) 때까지의 문헌이며, 현재 이 전적을 정리해 놓은 󰡔소장책자목록(所藏冊子目錄)󰡕이 운조루에 남아 있다. 이밖에 서화, 현판, 향촌문서, 민속자료 등 많은 자료들이 소장되어 있다.

▲ 운조루 쌀궤와 목독
현재 전남 구례 토지면 오미리 마을에 있는 운조루를 방문하면, 입구 행랑채에 9대 종부가 매표소를 지키고 있고, 장남인 10대 종손과 함께 이 터를 지키고 있다. 운조루에 소장되어 있는 민속자료 중 몇 가지 특징적인 것을 소개하고자 한다. 운조루의 안채에서 사랑채 큰 사랑으로 가는 중간에는 쌀궤가 놓여 있으며, 바로 옆에 목독이 있는데 독 아래쪽엔‘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새겨진 마개가 있다. ‘그 누구라도 필요하면 마개를 풀고 쌀을 가져가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또 안마당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장독대는 안주인의 정갈한 면모를 느끼게 한다. 제일 앞줄은 양념 및 젓갈류를 담고, 둘째 줄은 소금, 김치, 고추장 등을 담고, 맨 뒷줄은 제일 큰 독으로 간장을 담았다. 이 독 중에는 직경 2cm 정도의 흑점이 한두 개가 박혀 있는 것이 있는데 가장 오래된 독이라고 전해온다.

운조루는 각종 민란과 전쟁 중 에서도 온전히 보존되어 있어서 그 의미가 적지 않는데, 이는 문화류씨 운조루가 사람들의‘더불어 베풀며 사는 정신’덕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지금은 관광객들에게 한옥 체험으로 민박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 운조루는 현재 70여 칸만 전해지고 있으며, 1968년 11월 25일 대한민국의 중요민속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다.

지금 오미리 마을 입구에는‘운조루유물전시관’이 건립되어 2016년 4월 말 경에 개관을 앞두고 있다. 이 전시관에는 운조루 소장 고서화, 고문서, 고문헌, 민속자료 100여점이 전시될 예정이며, 이 전시관의 부설 수장고에는 운조루 소장 고문헌 중 전시되지 못한 자료들이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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