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오는 봄
다시 오는 봄
  • 문틈 시인/시민기자
  • 승인 2016.02.24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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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 우수가 지난 지도 여러 날이 되었다. 어떤 날은 햇볕이 따스하게 쬐는 때도 있다. 봄이 멀지 않았다는 기미다. 하지만 땅에 귀를 대고 봄이 오는 소리를 들을 때는 아직 아닌 것 같다. 뺨에 스치는 바람이 매섭다.

봄이 오려면 골목에서 어린 여자애들이 고무줄놀이를 하며 ‘정이월 다가고 새봄이라네’ 같은 낭랑한 노래를 불러야 한다. 그리고 월출산이 너울을 쓰듯 푸르스름한 이내에 잠겨야 한다.

피천득 선생은 그의 책에서 ‘봄을 사십 번이나 누린다는 것은 적은 축복이 아니다’라고 썼다. 꼭 사십 번이 아니더라도 하여튼 봄을 맞는다는 것은 스무 번일지라도 참 복된 경험이다. 내가 성서에서 가장 좋아하는 어귀는 자주 나오는 ‘내가 무엇이관대’라는 구절이다.

내가 무엇이관대 전우주가 나를 위하여 찬란한 봄을 이 지구별에 펼쳐놓는단 말인가. 임금님 수라상 같은 것에 댈 게 아니다.

딴은 봄이 온다고 해서 무슨 거창한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오지호 화백이 그린 사과나무밭 같은 데 가서 꽃잔치를 즐길 수 있다면 소원성취로 여길 참이다. 그 빛과 색깔의 생명감! 물론 전혀 할 일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

내가 사는 동네의 공터나 길가의 자투리 녹지대 빈 자리에 벚나무를 심고 싶다. 수십 킬로의 사막을 가로지는 울타리를 설치한 크리스토 같은 설치예술가마냥. 그래서 이 동네가 온통 벚꽃 동산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싶다. 그 벚꽃 길을 걷는다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그 나무 아래서 벚꽃이 휘날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얼마나 황홀할 것인가.

옛날 ‘마음의 행로’라는 영화를 봤다. 기억을 상실한 주인공이 개인비서로 온 ‘아내’가 남편의 옛 기억을 회복시키려고 무진 노력을 하다가 마침내 ‘아내’가 데려간 옛날 집으로 가는 길에서 주인공이 꽃핀 나무 가지를 쳐들고 들어가다가 아, 아, 아, 기억을 회복하여 자신의 비서가 ‘아내’였음을 알아보게 된다.

꽃이 핀 나뭇가지를 쳐드는 순간 그의 머리에 지난 생애가 펼쳐진 것이다. 그렇다. 시인 김영랑도 ‘꽃가지에 은은한 그늘이 지면/흰 날의 내 가슴 아지랭이 낀다’고 노래하지 않았던가.

사는 일이 점점 힘들어지고 고달파지는 것 같아도 삼천리 강토에 봄이 온다는 것은 예정되어 있으니 기어이 봄은 올 것이다. 그러니 어찌 설레지 않을 손가.

나는 누가 땅을 살까, 어쩔까, 하고 부동산 투자 이야기를 하길래 이렇게 말해준 적이 있다. “땅을 사지 말고 오는 봄을 사시오. 그러면 봄이 차지한 삼천리 땅이 죄다 당신 땅이 되지 않겠소.” 그냥 봄을 즐기라는 말이지만 내 진심이기도 하다.

어린 풀잎을 뾰족뾰족 내미는 풀뿌리, 꿈틀거리며 나온 땅속 벌레들, 막 피어난 온갖 꽃, 꽃들, 산들바람, 밭고랑에서 비상하는 종달새, 조잘거리며 산골짝에서 흘러오는 냇물… 죽은 것 같은 것들이 푸른 생명의 향연을 펼치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전우주적인 잔치에 초대받는 기쁨이 넘친다.

봄은 겨울을 거쳐서 온다. 그냥 비단길을 춤추듯 오는 것이 아니다. 언 강과 들판을 맨발로 딛고 온다. 그래서 봄의 내력은 언제나 춥다. 그래서 봄빛은 푸르고 또 푸르다. 복수초처럼 얼음장을 깨뜨리고 피어나는 푸른 봄은 전 우주에 무엇인가가 시작된다는 팡파르다. 그 시작에 맞추어 봄이 오면 들판에 나가볼 참이다.

마음 같아선 부드러운 흙고랑에 온몸을 뒹굴고도 싶지만 그랬다간 미친 사람이 되어 버릴까봐 그냥 뒷짐 지고 봄이 오는 것을 눈이 시리도록 바라볼 참이다. 생각만으로도 온몸에 피가 세차게 흐르는 것 같다. 이것을 약동이라 하던가. 이번 봄을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본 것처럼 그렇게 맞이하고 싶다. 봄을 꼭 끌어안고 싶다.

봄이 오거든 다들 용서했으면 한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하는 마음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필시 봄은 그런 약속을 지키려고 다시 오는 것이리라. 살아있다는 것이 축복이며 선물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라고 봄은 부활하는 것일 터다. 아니, 그런 복잡한 생각 같은 것은 접어두고 보리밭 하늘에 솟아올라 터뜨리는 종달새의 노래를 한 소절이라도 따라 불러보리라. 그 노래는 익히 하는 노래이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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