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정의를 실천한 정의행 법사 잠들다
행동하는 정의를 실천한 정의행 법사 잠들다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6.02.23 10: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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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운동가, 시대 아픔 보듬고 별이 되다

‘애들아 어서 올라와! 끝까지 기다릴게.’
속울음 삼키며 글을 적습니다
무심한 파도가 밀려오는 팽목항에서
아직도 바다 속 울고 있을 넋들에게
노란 편지를 바람에 띄웁니다
-「엄마손」부분

왜 이렇게 눈물이 흐르는 걸까
수많은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을 때
수많은 생명들이 죽어가고 있을 때
너 거기 있었나, 나 거기 있었나
-「거기 있었나」부분

【시민의소리=김다이 기자】시민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현장이나 ‘세월호 3년 상을 치르는 광주시민’모임에서 매번 만났던 정의행 법사는 선하고 따뜻한 인상을 지닌 사람이었다.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손짓하나 발걸음 하나에서 정도를 걷는 사람이라는 게 눈에 보이는 사람이었다. 취재진들의 카메라와 냉혹한 현장 속에서 의행 법사가 달고 다닌 노란리본보다 그의 인자한 얼굴이 늘 눈에 먼저 띄었다.

광주에서 민주·평화·인권을 위해 활동해왔던 정의행(본명 정철) 법사가 백혈병 진단을 받고 투병생활을 이어왔으나 지난 16일 5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고인은 급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고 6개월간의 투병생활을 이어왔으나 3차 항암치료 도중 폐렴이 찾아와 별이 됐다.

그는 살아생전 시대적 아픔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현장에서 함께했다. 1958년 전남 순천 장천동에서 태어난 그는 광주일고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졸업이후 1978년에는 경기도 봉선사 조실스님이었던 운경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그는 본명 정철보다 정의행으로 더 알려져 있다. 그는 그의 법명 ‘의행 (義行)’처럼 행동하는 정의를 실천하면서 노동운동과 야학에 헌신하며 지냈다.

1980년 민주화를 외치던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계엄군의 만행으로 피바람이 몰아쳤던 5.18민주화운동을 경험했다. 고인은 당시 무고했던 시민들이 희생됐던 참담한 현장을 목격하며 5.18에 참여했다.

그렇게 왜곡된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기를 바라며 걸어왔던 그는 5.18의 진상규명을 외치다 결국 옥고를 치르게 된다. 이후 1990년 고인은 5.18 민주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의행 법사는 지역사회의 단단한 작은 버팀목으로 불교 교육운동을 하면서 평화운동에도 전념했다. 1987년 6월 항쟁이후에는 ‘이바지출판사’를 운영하며 ‘한국불교통사’를 시작으로 저술과 번역서 20여권을 출간하기도 했다.

평생을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운동에 혼신을 다했던 그는 2014년 세월호 참사를 가만히 지켜만 볼 수가 없었다. 아직 꽃도 피우지 못한 어린 학생들을 구조하지 못한 무능한 정부와 제대로 사고원인을 밝혀 내지 못해 진상규명이 되지 않아 다시 현장으로 뛰어들게 됐다.

이후 ‘세월호 3년상을 치르는 광주시민상주모임’에 참여해 시민들과 함께 진상규명, 서명운동, 법원 진실마중, 천일 순례 등에 함께 하고, 지난해 4월 이를 바탕으로 쓴 시집 ‘노란 리본’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의 시는 노래로도 만들어져 노래 ‘바람과 꽃씨’로 세상에 남았다. 지난해 초에는 호남평화인권사랑방을 창립하고 의장을 역임하는 등 평생을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운동에 헌신했던 그는 지난 2월 16일 영면을 맞이하게 됐다.

한편 정의행 법사 49재는 초재(2월 22일)와 막재(4월 4일)를 문빈정사에서 지내고 3,4,5재는 광륵사에서 봉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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