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 서거 22주기에 오늘 우리 할 일을 새기다
김남주 서거 22주기에 오늘 우리 할 일을 새기다
  • 박용구 기자
  • 승인 2016.02.14 02: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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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되기 전까지는 오늘의 시인이자 내일의 시인”

자유와 통일을 노래한 전사(戰士) 김남주 시인의 22주기 추모식이 13일 오전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서 열렸다.
【시민의소리=박용구 기자】“김남주 시인이 오늘 더욱 그리운 이유는 돌아가신지 22년이 흘러서가 아니라 22년이 흘렀어도 전혀 변하지 않고 있는 이 세상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와 통일은 오늘도 짓밟히고 있습니다. 김남주 시인이 생전에 부르짖었던 자유와 통일의 과제는 현재진행형입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지는 김남주 시인의 책 속에 다 나와 있습니다. 솔직히 말합시다”

“즐거워야 할 추모제가 이리도 무거운 것은 세상 돌아가는 꼴이 암울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는 민족시인 김남주 22주기 추모제에 참석한 이들의 말들이다.

자유와 통일을 노래한 전사(戰士) 김남주 시인의 22주기 추모식이 13일 오전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서 열렸다.

김남주기념사업회와 광주·전남작가회의가 마련한 이날 추모제에는 유가족을 비롯해 민주인사, 문인 등 100여명이 참여했으며, 추모제는 민중의례, 내빈소개, 추모사, 추모의 노래, 추모시, 기념사업회 사업보고, 유가족 인사, 헌화 및 분양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이강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상임대표는 추모사를 통해 “박석무 선생이 물봉(昒蜂)이라는 호를 농담 삼아 제안했는데, 한자 뜻을 모르고 들으면 바보스럽게 무른 사람이라고 들리는 이 호를 시인이 흔쾌히 받아들였다”면서 “시인은 이후, 그 호가 뜻하는 대로 새벽을 열기 위해 벌처럼 독하게 혁명가의 길을 걸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또 “개성이 폐성으로 되어 가는 지금 세상을 보면서 김남주 시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모두가 생각해 봤으면 한다”면서 “이를 과제로 남긴다”며 말을 마쳤다.

박석률 평화경제미래포럼 대표는 “동지이자 친구로서 가장 오래 남아있는 사람”이라고 회고하고, “김남주 시인의 책이 집에 한 권이라도 있다면 꺼내어 읽어보자. 그럼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 쓰여 있다”면서 “이제 솔직히 말하자”고 힘주어 말했다.

김준태 광주전남작가회의 고문은 “통일이 되기 전까지 김남주 시인은 과거의 시인이면서 오늘의 시인이자 내일의 시인”이라며 말을 꺼냈다.

그는 “우리나라가 다시 중국과 미국 사이에 끼여 대리전의 희생양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면서 “민족이란 단어는 살아있는 화두다. 3년 안에 엄청난 변화가 있을 것이다. 지금은 터널의 순간이지만 터널을 지나면 탁 트인 지평선이 열릴 것이다”고 강조했다.

추모사가 끝난 후 내벗 소리 민족예술단은 ‘하나 됨의 꿈’을 노래했고, 김미승 시인이 ‘터널을 지나며’라는 추모시를 낭송했다.

시인의 아들인 김토일 군은 유가족 인사를 통해 “다른 일정으로 어머니가 참석하지 못했다”면서 “매년 잊지 않고 찾아주셔서 감사드린다”고 인사했다.

그는 이어 “아버지가 열심히 살았듯이 저 또한 앞으로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했다.

이날 추모제는 민족민주열사묘역에서 광주 북구 운암동 중외공원으로 이동, 시인의 시비를 참관한 후 마무리됐다.

김남주는 80년대와 90년대 한국 문학사의 획을 그은 민족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1946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시인은 1964년 광주일고에 입학했으나 입시 위주 교육에 반발하며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1969년 전남대 영어영문학과 입학했다.

유신정권이 들어선 직후인 1972년 12월, 친구인 이강과 함께 전국 최초의 반유신 지하신문인 ‘함성’을 제작·배포하고, 이듬해 2월 전국적인 반유신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지하신문 ‘고발’을 제작·배포했다. 이로 인해 그는 8개월 동안 투옥됐으며 학교에서도 제적당했다.

시인은 1974년 계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진혼가’, ‘잿더미’ 등 8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제적 후에는 전남대 앞에서 사회과학서점 ‘카프카’를 운영하면서 광주사회문화운동의 구심 역할을 맡았다.

그 후 고향인 전남 해남에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농민문제와 민주화운동에 관심을 기울이던 그는 1979년 10월,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체포돼 15년형을 언도받았다. 1988년 12월, 형집행정지로 9년 3개월만에 전주교도소에서 출소했다.

시인의 나이 49세였던 1994년 2월13일 새벽 2시30분, 오랜 췌장암과의 투병 끝에 그는 결국 세상을 등지고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치됐다.

시인은 생전에 발표한 470여 편의 시 가운데 300여 편을 옥중에서 써 ‘옥중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휴지조각·우유팩·은박지 등에 깨알 같은 글씨로 꾸준히 쓴 시편들은 면회 온 부인과 지인들에 의해 세상 밖으로 흘러나와 투옥 중에만 『진혼가』(84년), 『나의 칼 나의 피』(87년), 『조국은 하나다』(88년) 등 3권의 시집으로 묶였다.

20주기 때는 최초로 그의 시 전편(519편)을 묶어낸 ‘김남주 시전집’(창비)이 발간되었다. ‘김남주 시전집’은 거칠게 쓰인 옥중시편을 꼼꼼하게 교정하고, 서로 다른 판본을 대조해 정리해 냈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김남주는 80년대와 90년대 한국 문학사의 획을 그은 민족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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