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세계에 알린 위르겐 힌츠페터 별세
5·18 세계에 알린 위르겐 힌츠페터 별세
  • 권준환 기자
  • 승인 2016.02.03 16: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취재 과정서 ‘푸른 눈의 목격자’별명 얻기도
市, 분향소 운영 및 추모비 설치 협의

5·18민주화운동의 참상을 세계에 알린 독일의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Jürgen Hinzpeter)씨가 오랜 질병 끝에 지난달 25일 독일 북부의 라체부르크(ratzeburg)에서 향년 79세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했다.

힌츠페터씨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독일의 공영방송 ARD의 북부지역방송인 NDR의 카메라 기자였다. 그는 일본특파원으로서 광주의 당시 상황을 현장에서 취재해 가장 먼저 세계에 알렸다. 현재 전해지는 5·18민주화운동 관련 영상 및 사진의 대부분이 힌츠페터씨가 촬영한 것이다.

힌츠페터씨의 보도는 한국 군부독재의 폭력과 만행이 전 세계에 알려지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대학가에서 ‘광주 민중항쟁의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쉬쉬하며 대학생들이 돌려보던 다큐멘터리가 바로 힌츠페터씨가 촬영한 영상을 편집한 것이다.

1937년 독일에서 태어난 힌츠페터씨는 원래 의사를 꿈꾸는 의학도였으나, 방송국에서 잠깐 일을 하게 된 것을 계기로 NDR의 카메라 기자가 됐다. 베트남, 캄보디아 등 아시아 현장을 다니다가 1978년 일본특파원으로 발령받았다.

이후 1980년 5월, 한국 광주의 심각한 상황을 접한 그는 때로는 시민군과 함께 버스를 타기도 하고, 때로는 계엄군과 함께 걷기도 하면서 5·18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생생히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이때 한국 사람들에게 ‘푸른 눈의 목격자’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힌츠페터씨는 2004년 심장질환으로 인해 갑자기 쓰러졌지만, 응급실에 누운 상황에서도 가족들에게 ‘광주에 묻어달라’는 말을 수차례 반복했다고 한다. 이후 어렵사리 건강을 회복한 힌츠페터씨는 2005년 광주를 다시 찾아 ‘가족의 반대로 광주에 묻히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며 손톱과 머리카락이 담긴 봉투를 남긴 채 독일로 돌아갔다. 힌츠페터씨의 가족은 그가 가족묘지에 묻혔으면 좋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졌다.

힌츠페터씨의 사명감으로 인해 5·18민주화운동이 세계에 알려지면서 자칫 ‘폭동’으로 몰릴 수도 있었던 광주정신이 온전히 평가받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이에 광주시는 위르겐 힌츠페터씨의 장례식에 4일 시 조문단을 파견하기로 했다. 또 광주민중항쟁의 진상을 전 세계에 알려 5․18 광주정신의 세계화에 기여한 고인의 뜻을 기리고 광주시민의 감사한 마음을 담은 추모사와 함께 광주광역시 명예시민증을 전달할 예정이다.

아울러 5․18묘역에 힌츠페터 추모비 설치 문제와 신체 일부(머리카락, 손톱)의 안장 방법, 올해 5·18 추모행사에 유가족들의 참석 여부 등에 대해서도 유족들과 협의하기로 했다.

한편 광주시는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동구 금남로 옛 가톨릭센터에 위치한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분향소를 설치해 3일부터 5일까지 운영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