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88] 안녕 내 청춘! 굿바이 양림동!
@[응답하라 1988] 안녕 내 청춘! 굿바이 양림동!
  • 김영주
  • 승인 2016.01.21 13: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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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아름답다! 무조건. 왜 그럴까? 세월을 되돌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갈 수 없는 나라, 과거와 미래! 멀어질수록 아득하고 까마득해지면서 희뿌연 안개가 점점 짙어간다. 미래는 허공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처럼 깜깜하고 막막해서 불안감을 넘어서서 때론 두렵기도 하다. 그런데 과거는 갈수록 희미하긴 해도 발을 딛고 갈 터전이 있어서 미래처럼 막막하진 않다. 그래선지 (어지간히 나쁜 상처가 아닌 바에야) 과거는 미래와 정반대로 나쁜 일마저도 아름답게 다가온다.

누군가 “고향이 어디?”라고 물으면, 전라도를 벗어나선 ‘전라도 광주’라고 대답하고, 전라도에선 ‘영광’이라고 대답한다. 광주천변의 금동시장 뒤쪽에서 태어나 그 언저리에 살다가, 아홉 살에 2번 버스 종점 ‘양림동 오거리’로 이사하여 ‘신나는 어린 시절과 청춘’을 보내고, 서른 살에 사직공원을 너머 ‘백운동’으로 넘어가서 결혼하고 쉰 살까지, 금동 10년 · 양림동 20년 · 백운동 20년 · 진월동 10년에, 환갑을 코앞에 두고 있다. 금동 10년은 기억나는 게 적고 어슴푸레하니까, 굳이 내 고향을 꼽는다면, 양림동 20년의 ‘양림 오거리’와 ‘사직공원’이라고 할 법하다. 광주천으로 말하면, ‘양림다리와 금동다리’를 중심으로 남광주 철도다리부터 광주공원 다리까지가 내 놀이터였다. 80시절 중반까진 거의 그대로였는데, 지난 30년 동안에 그 80%가 사라져 버리고 20%가 넝마조각처럼 초라하게 너덜거릴 뿐이다. “산천은 의구依舊한데 인걸人傑은 간 데 없네!”란 싯귀가, 내겐 글자 그대로 “옛 시인의 허사虛辭로다.”

우연히 ‘양림동을 살립시다!’ 행사를 먼발치에서 스치듯이 지나쳐 버린 것도 “뭐, 제대로 남은 게 있어야지?” 싶었다. ‘호사가’들의 괜한 돈잔치가 아닐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은 걸까? 하기사 그 때 그 시절엔, 그런 게 문화자산으로 소중한 것인 줄을 누가 알았나? 지금 사람들이 호들갑을 떠니까, 그런 게 그런 거였나 할 따름이다. 우리가 온 몸으로 부대껴 지내온 지난 50년은 서유럽의 지난 500년이었다. 엄청난 격변의 시대였다. 등잔불에서 스마트폰까지, 가히 원시시대에서 우주시대라고 할 만하다. 

메인 포스터

57년, 닭띠! 나이도 머리털도 건강도, 반백을 훌쩍 넘어섰으니, 모든 게 내리막길이다. 그래선지 요즘 부쩍, 607080시절의 풍물을 만나거나 돌아가신 ‘울엄니’가 떠오를라치면, 목이 메고 눈물이 펑펑 쏟아진다. ‘우울증’인가 싶기도 하지만, 설마 내가 ‘우울증’일 리 없다며 도리질을 친다. 드라마[응답하라 1988]이 딱 그러했다. “[응답하라 1994], 전라도와 경상도를 비롯한 팔도에서 촌놈들이 ‘신촌 하숙’에 모여들어 알콩달콩 벌어지는 사건들이 싱그럽고 편안해서 저절로 드라마 안으로 빨려들었다.”고 이야기했는데, [1988]은 [1994]의 알콩달콩 하고 싱그러운 재미를 넘어서서, 6070시절에서 그리 멀지 않은 촌스런 풍물들과 변두리 달동네 이야기가 내 맘을 더욱 잡아당겼다.

내 아홉 살 65년 어느 날, 가난했지만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양림동 오거리 시절’이 열렸다. 광주에서 나고 자란 놈들이 반틈, 시골에서 올라온 놈들이 반틈. 스무 명에서 서른 명이 떼거리로 골목골목을 누비며 몰려다녔다. 내 나이 또래가 가운데 토막으로 가장 많고, 가장 아래에서 가장 위가 열 살쯤 차이가 났다. 중학생이 되면 동네 아이들과 노는 걸 창피하게 여기는 풍토가 암암리에 그 가름을 지었다. 열 대여섯 살이면 마포바지에 방구처럼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그런데 우리 또래가 사라진 뒤, 동네에는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걸 되찾을 수가 없어선지, 나의 그 시절은 내 가슴에 꽃처럼 아름답게 남아있다. [괭이부리말 아이들]과 [아홉살 인생] 그리고 [친구], 그 어느 글이나 영화 그리고 그 어느 누구의 어린 시절을 들어보아도, ‘그 때 그 시절’에 ‘양림오거리 · 사직공원 · 광주천’을 누비며 엮어낸 그 이야기를 넘어서지 못했다. [응답하라]씨리즈도 마찬가지이다. 훨씬 즐겁고 신나고 슬프고 화나고, 마구 달리고 엎어지고 때리고 깨지고 찢기고 부서졌다. 반쯤이 양아치 쪽으로 흘러갔으나, 선량해선지 자잘해선지 깡패까지 가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만나는 친구는 세 명이다. ‘그 때 그 시절’에 만약 ‘대현이=땡이(만화 주인공)’가 없었다면, 그 즐거움이 ‘반에 반쪽’도 되지 못했을 게다. 1년 12달에 10개 이상의 놀이가 뱅뱅 돌아가는데, 그 놀이를 모두 그가 앞장섰다. 땡이는 공부 말고는 모든 놀이에 왕초다. 하늘에 별처럼 수많았던 우리의 이야기들 중에 하나가, [친구]의 영화이야기이다.

그 친구들의 부모형제들까지 50여 명이 두루두루 얽혀서 수많은 사연에 울고 웃고 싸웠다. 드라마처럼 좋은 일만 있는 게 아니라, 바람난 사건 · 동네사기꾼 사건 · 계 파동 · · · 에서 살인사건까지 별별 잡스런 사건이 회오리치기도 했다. 착한 사람도 많지만, 이래저래 못된 사람도 있고, 가난하다 보니 꼬여든 일도 있다. 따지고 보면 그 세월이 짧게는 5~6년이고 길게는 10~20년인데, 평생을 함께 살 것처럼 서로 기대며 부대끼고 살았다. 그런데 ‘영철이네’가 이사를 갔다. 그 때 그 당시엔 무덤덤했다. “이사 가~? 그래~?” 그 뒤로 두어 번 놀러오더니, 그리곤 나도 모르게 잊혀져 갔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게 ‘그 아름다운 시절’이 시들어가는 첫 신호탄이었다. 도시는 떠돌이가 모였다가 흩어져 가는 터미널과 같은 곳이다. 끊임없이 오고간다. 정이 붙을 만하면 헤어진다. 그 때 그 친구가 아직도 그 자리에 한두 명 남아있다. 그렇게 동네 터줏대감으로 몇 십년간 그 골목에 못 박은 듯이 살고 있는 사람도 없지 않지만, 결국은 떠나간다. 전화도 없던 시절인지라, 이사 가면 그걸로 끝장이었다. “88년, 굿바이 양림동!”

참 허망하다. 이렇게 고향을 잃고 부평초처럼 떠도는 허망한 도시생활이 그러하고, 게다가 아파트에 살면서 더욱 그러하다. 더구나 요즘엔 그나마 마지막 남은 끌텅인 ‘핵가족’마저 흐트러지는 느낌이 들어서 그 쓸쓸함이 스산하기까지 하다. 그래선지 ‘인생은 나그네 길’과 ‘향수’를 자꾸 읊조린다. [1988]에서 많이 웃고 울었지만, 마지막에 ‘이사 가는 장면’에 나의 그 시절 그 장면들이 한꺼번에 겹쳐들며 그 시절이 그리워서 마구마구 울었다. 이 드라마의 주제가나 다름없는 김창완의 ‘청춘’이 더욱 처연하게 들려왔다. 하필이면 그 노래가 나의 스무 살 청춘을 이별하고 서른 살을 맞이하는 사연과 엮여있어서 더욱 애잔하게 가슴에 저며 왔다.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내~청춘! 지고 또 지~는 꽃잎처~럼♪ · · ·” “88년, 안녕 내 청춘!”

가족관계도

성동일의 전라도 사투리도 조금은 덜 어색하게 들렸고, 여전한 이일화 연기력은 그대로 좋았지만, 이웃집 선우엄마와 함께 1000년을 이어가도록 튼튼하게 볶은 파마머리는 드라마 내내 답답했다. 라미란의 천연덕스런 연기는 [댄싱 퀸]이래로 잘 나가고 있다. 전국노래자랑 예선에서 “계란이요~계란!” 에피소드가 배꼽 잡고 눈물 콧물까지 잡았다. [범죄와 전쟁]의 깡패 김성균이 [1994]의 삼천포와 [1988]의 찌질이로 변신이 사뭇 놀라웠다. 무엇보다도 이웃집 선우엄마가 처음 보는 배우인데도, 라미란보다도 더 돋보일 정도였다. 물론 이들은 중년 연기자로 연기에 물이 올랐다고 하겠으나, 그 젊은 청춘들은 모두 처음 보는 얼굴인데도 모두 자기 캐릭터에 혼신을 다했다. 그 중에서 감초 도롱뇽과 7수생 정봉이와 막내 노을이는 다른 캐릭터를 연기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덕선이는 발군이다. 진주라는 꼬마아이가 어려도 너무 어린데도, 어쩌면 그 캐릭터에 그렇게 딱 맞추어 연기하는지 참 신기했다. 연출자의 능력일까?

케이블TV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시청율이 20%에 가까웠다고 하니 놀라운 기록이다. 모든 걸 정겹고 훈훈하게만 이끌고 가고 지나치게 해피엔딩으로 몰아가는 게 아쉽다. 이 삭막한 세상에 ‘그 때 그 시절’의 훈훈한 정겨움만을 일부러 과장한 듯하다. 88년을 즈음한 그 시절의 일상생활을 그려내려고 만들어낸 쌍문동의 봉황당 골목길, 그리고 일상생활의 갖가지 풍물과 소품을 찾아내고 만들어내느라 무대감독과 미술감독 의상감독이 고생 많았겠다. 게다가 그 시절의 주옥같은 노래들을 시나리오 내용에 발맞추어 곁들이고 TV프로그램까지 찾아서 보여준 음악감독과 스텝들의 정성에 흘린 땀에 감사하다. * 대중재미 : 80이전 출생 A+· 80이후 출생 A0, * 연출기술 A+, * 연출자의 관점과 내공 : 민주파 A0.
 
<다시보기 코너> http://program.interest.me/tvn/reply1988/6/Vod/List?vod_type=1&or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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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88년에, 신영복님이 억울한 20년 감옥생활에서 벗어나 이 세상으로 나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습니다.
 
‘시대의 스승’ 신영복님의 영전에 삼가 명복을 빕니다.
 
이토록 빨리 떠나실 줄 미처 몰랐습니다.
‘처음처럼’ 소박한 진정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더불어 숲’이 이루지는 세상을 향하여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손석희 : 신영복 추모  5분 동영상 '청구회의 추억'>
 http://1boon.kakao.com/issue/shinyoungbokspromise
 
 

<신영복님 동영상 강의 : 1시간 20분 > 이 동영상 끝난 뒤에, 연결된 다른 동영상 '행간과 여백'이라는 강의(1시간 30분)가 좀 더 편안하고 소박해서 신영복의 인품에 훨씬 더 어울린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xiaoao&logNo=220375148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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