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의 종각’터는 민주화의 고통 서린 곳
‘민주의 종각’터는 민주화의 고통 서린 곳
  • 권준환 기자
  • 승인 2016.01.07 13: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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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전남도경 정보과 대공분실로 사용
수많은 구타와 고문, 사건 조작된 현장

최근 ‘민주의 종각’터의 역사성을 알리기 위한 안내판이 민주의 종각 앞에 세워졌다.
이 안내판에 의하면 민주의 종각터는 전라남도 경찰국 부속 건물이 세워져 정보과 대공분실로 사용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실제로 이곳은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모진 탄압과 고문을 받는 등 민주화의 고통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현재 민주의 종각이 위치한 옛 도청 언저리는 고려시대에 ‘대황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다.
대황사 옆으로 무등산에서부터 내려온 물이 만든 연못이 있었다. 그러다가 조선조에 들어와서 광주읍성을 만들었고, 진남문이라 했다. 시간이 지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1930년경 오늘날의 (구)전남도청이 들어서게 됐다.
이후 1959년에 전라남도 경찰국(전남도경) 부속 건물이 현 민주의 종각 자리에 생긴다.

민주의 종각 터 역사성 안내판은 1959년 이후의 역사적 의미를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이 전남도경 부속 건물은 정보과 대공분실(對共分室)로 사용됐다. 보안분실(保安分室)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대공 업무 외에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 1982년 횃불회 사건 등 많은 사건들이 조작된 현장이기도 하다.

민청학련 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돼 구속된 후 실제로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당했던 김상윤 씨는 “1972년 12월 유신체제에 최초로 저항한 행동인 함성고발지 사건이 크게 확대돼 열 몇 사람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끌려들어갔다”며 “이 사람들이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당했다”고 말했다.

그는 “시국사건들을 다룰 때, 고문하고 두드려 패는 등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고문당했다”고 회상했다. 대공분실 안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묻자 “물고문 등의 고문을 당하진 않았지만, 여러 사람이 둘러싼 상황 속에서 몽둥이로 무척 많이 맞았다”고 끔찍한 기억을 떠올렸다.

최운용 5·18민주유공자회 설립추진위원회 상임고문은 ‘횃불회 사건’의 산 증인이다.
최 고문은 1960년 제5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5·18민주유공자이기도 한 故 김윤식 전 의원으로부터 전두환 정권을 비판하는 내용을 실은 신한민보를 입수했다. 신한민보는 미국 LA에서 발행된 신문이었는데, 김윤식 전 의원의 딸이 보내준 것이었다. 최 고문은 이 신문을 두 차례에 걸쳐 복사해 돌려보다가 횃불회 사건으로 잡혀 들어가게 된다.

그 당시 대공분실이라는 장소가 민주화 투사들에게 어떤 의미로 통했는지 최운용 고문을 통해 들어볼 수 있었다.
그는 '횃불회 사건'으로 잡힌 후 서울에서 조사를 받고 압송돼서 광주로 내려왔다. 광산경찰서에 있으면서 조사를 받고 구타를 당했다. 하룻밤을 잔 후 눈을 가리고 뒤로 수갑을 채워 팔을 묶어서 승용차에 태우고 한참을 갔다. 운동장을 돌듯이 차가 빙빙 돌다가 내려서 경찰관들이 양팔을 붙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최 고문의 증언에 따르면 도착한 방은 벽이 빨간 방이었고, 벌집처럼 구멍이 뚫려 있었다. 탱크와 비행기 소리가 ‘우르릉’났고, 방 한쪽엔 욕조가, 한쪽엔 매트리스, 또 한쪽엔 작은 책상과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언뜻 상상해 봐도 굉장히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밀폐된 공간 속에서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내가 죽어도 누구 한 명 알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최 고문은 조사를 받고 난 후, 다시 눈이 가려진 채 승용차에 태워져 광산경찰서로 돌아갔다.
그는 아직까지도 당시 끌려갔던 지하 고문실이 정확히 어딘지 알지 못한다. 다만 쌍촌동 지하에 대공분실이 있었다는 사실에 따라 그곳이 아니었을까 추측할 뿐이다.

이렇듯 그 당시를 겪은 민주화운동 원로들에게 있어 ‘대공분실’이라는 단어는 다시 떠올리기 싫은 공포의 공간이었음이 분명하다.
이후 2003년, 광주시는 ‘광주 민주·인권·평화도시 육성 종합 계획’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이곳을 ‘민주의 종각’부지로 제안했다. 당시 ‘광주 민주의 종 건립추진위원회’는 역사적 상징성과 의미가 크고 5·18민주광장에 인접한 이곳이 ‘민주의 종각’ 부지로 가장 적합하다고 결정했다.

민주의 종은 2005년도에 처음 설치됐다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건립공사로 2009년 해체돼 환경시설관리공단에 옮겨져 임시 보관했다. 이후 2011년 ‘깨진 종’ 논란 이후 재제작돼 2013년 원형 복원됐다.

하지만 5·18을 직접 겪은 최운용 고문은 민주의 종각의 위치가 사실상 적절하지 못하다는 지적이다. 최 고문은 “옛 전남도청 건물은 국가 사적지로 지정돼있다”며 “국가 사적지 100미터 근처에는 어떤 근조물도 세울 수 없다고 법으로 정하고 있다”고 말하며 전남도청을 포함해 근처 역사적 건물들을 원형 보존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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