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을 돌다(11)
무등을 돌다(11)
  • 이종범 조선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 승인 2015.12.23 15: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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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충장공 김덕령이 언제, 어떻게 의병에 나서게 되었는가를 살필 차례입니다. 제봉 고경명의 호남창의회맹군이 금산성의 왜적을 공격하다가 실패하였음은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이때 형 김덕홍도 참전하여 순절하였지요. 망연자실 금산으로 달려가 운구하고 장례를 치렀던 김덕령은 그렇다고 세상 밖으로 나설 수 없었습니다. 형이 그토록 당부한 연로한 모친이 이제나 저제나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1년,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들렸습니다. 진주성이 무너진 것입니다. 1593년 6월 하순인데, 이즈음 노모마저 별세합니다. 제2차 진주성전투까지의 경과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군요.

임진년 10월 일본은 호남을 노리기 위하여 진주성을 파고들었습니다. 그러나 진주목사 김시민, 경상우병사 김성일을 비롯하여 정인홍ㆍ곽재우ㆍ김면(金沔) 같은 영남의병장의 활약으로 막아냈습니다. 이때 화순의 최경회와 보성의 임계영이 이끌었던 호남의병이 결정적 힘을 보탰습니다.

제1차 진주성전투로 영남 사람은 호남 덕분에 살았다는 찬사를 거듭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봄 권율 장군이 행주대첩을 이끌고 마침내 한양을 수복하게 됩니다. 이때 권율의 직함은 전라감사, 곧바로 도원수로 승차합니다. 호남관군의 역할이 어떠하였을지는 충분히 짐작하시겠지만, 장성선비 변이중은 획기적인 다발 화차를 제작하여 전력을 보강하였습니다.

일본은 거듭 퇴각하다가 작년 실패를 앙갚음하려고 진주성으로 집결하였습니다. 남원 출신으로 충청병사가 되었던 황진이나 한동안 강화도와 한강수로를 지키다가 행주대첩과 한양수복작전에 참여한 김천일, 제봉의 아들로 복수의병을 일으킨 고종후가 왜적을 쫓아 진주성으로 내려왔습니다.

이때 진주성을 책임지는 경상우병사가 최경회였습니다. 그간 공로를 인정받아 격무로 세상을 떠난 김성일의 후임이었지요. 그런데 상황이 고약하게 돌아갑니다. 영의정 유성룡을 비롯한 영향력 있는 당국자들은 일본과 강화회담을 시작하는 마당에 성을 비우는 공성(空城)도 무방하다는 기류가 형성된 것입니다. 도원수 권율은 물론이고 곽재우나 임계영과 같은 의병장까지 군사를 물리거나 구원을 꺼려하였습니다.

최경회를 비롯한 호남의사들은 달랐습니다. 진주가 무너지면 호남이 위험하다! 끝까지 사수해야한다는 수성론이었지요. 장대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는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십만 왜적과 여드레를 싸웠습니다. 죽음의 공포에 떨던 군사를 다그치며 최후의 일각까지 분전한 황진의 혈투는 눈물을 훔치게 만듭니다. 최경회, 고종후, 김천일 세 분이 촉석루에서 술 한 잔을 나누고 남강에 투신하였다는 사연 또한 뭉클합니다. 승전에 취하여 거들먹거리는 왜장을 부둥켜안았던 논개의 의열은 붉디붉습니다.

왜적의 진군은 구례 섬진강 석주관에서 막혔습니다만, 호남의 충격은 컸습니다. 모친 장례를 마친 김덕령이 상복을 벗게 된 사연입니다. 매형 김응회와 육촌고종형 송제민이 권장하고 처남 이인경(李寅卿)과 의기투합하였습니다.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과 장성현감 이귀(李貴)도 군량과 군기를 뒷받침하였습니다.

김덕령은 고려의 해도원수 정지의 묘소에 제사를 지내고 그가 남긴 갑옷을 입었습니다. 외가라고 합니다. 여러 겹 철판을 고리로 묶은 갑옷은 광주민속박물관에서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는데, 보물 제336호입니다. 도원수 권율에게 ‘초승(超乘)’이란 군호를 요청하여 받아냈습니다.

영남 출전을 승인받은 셈이지요, 이때 임금을 떠나 제2의 조정 즉 분조(分朝)를 이끌던 세자 즉 광해군이 김덕령을 전주로 초치하고 날개를 단 호랑이, ‘익호(翼虎)’로 불러줍니다. 선조 또한 ‘충용(忠勇)’ 깃발을 하사하였으니, 앞은 장군의 호칭이고 뒤는 부대의 명칭입니다. 충용군의 익호장이 된 것이지요. 1594년 정월, 27살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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