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소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창의주도형 지원사업의 하나로 호남의 누정문화를 새롭게 알아보는 자리를 마련한다. 누정문화가 단순히 옛 선조의 장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에 되살려 우리의 신문화로 정립할 수 있는 창의적인 접근을 시도할 것이다. 이번 기획에는 전남대 호남한문고전연구실이 함께 했다. <편집자주>
⑤ 송강정
그는 처음 이곳에서 초정을 짓고 살았는데, 당시의 초정의 이름이 죽록정(竹綠亭)이었다. 지금의 정자는 1770년에 후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세웠는데, 그 때 누정의 이름을 송강정으로 하였다. 그래서 이 누정에는 송강정과 죽록정 두 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이러한 내용은 그의 6대손 정재(鄭栽, 1720~1788)가 1769년에 지은 <송강정유허수리시서(松江亭遺墟修理詩序)>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마침내 그 위에 올라가 주위를 바라보니 높은 언덕위에 허물어진 담과 주춧돌만 남아있고 모두 황폐되어 식별할 수 없었다. 옛날 주자(朱子)가 “무너진 소평대(沼平臺)에 국화만 무성한데 초동, 목수들이 그 위에서 휘파람불고 노래하며 주저하는구나”라고 한탄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옛날을 우러르고 굽어보니, 어느덧 수 백 년이 흐른 뒤라 서글픈 감회가 일어나 배회하며 차마 떠나지 못하였다. 이에 돌아가서 오물을 제거하고 중수할 뜻을 종중(宗中)에 도모하고 의견을 같이 하는 사람들에게 물어서 금년 봄에 선조 사우에 배알하고 그대로 정자 터에 가서 몇 그루의 소나무를 심고, 또한 가까이 있는 아홉 군데 무덤주인을 설득시켜 이장케 하였다.
위의 내용처럼 송강 정철의 6대손인 정재는 이미 황폐되어 식별할 수 없는 송강정을 안타까워하여 200여년이 지난 1769년에 본래의 터에 정자를 세우고 주변에 수 백 그루 소나무도 함께 심었다. 무엇보다 정재는 초정이 있던 옛터의 인근 마을 사람들에 의해 처음 초정의 이름이 ‘죽록정(竹綠亭)’ 이었음을 200여년이 지난 후에 새롭게 알게 되었던 것이다.
병든 학처럼 미처 귀향하지도 못했는데 身如病鶴未歸山
시내가 송죽 골짜기 난초는 시들었겠지 溪老松筠谷老蘭
한강의 가을바람 시름 속에 불어오고 漢水秋風愁裏渡
남쪽고향은 길 꿈에서도 아른대는데 楚雲鄕路夢中漫
인간사 겪고 나니 머리 온통 희어지고 人情閱盡頭全白
세상맛 보고 나니 이도 더욱 시럽더군 世味嘗來齒更寒
멀리 송강에 낚시하는 옛 벗 생각하며 遙憶松江舊釣侶
달밤에 노 저으며 앞 여울 내려간다네 月明搖櫓下前灘
그리고 다음 도문사에게 주다[贈道文師]라는 시는 낙향을 해서 지은 시인데, 송강 정철의 낙향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조그맣게 죽록정 새로 짓고 小築新營竹綠亭
송강 맑은 물에 내 갓끈 씻으며 松江水潔濯吾纓
세속의 거마 모두 거절하고 世間車馬都揮絶
산달 강바람을 그대와 평하리라 山月江風與爾評
그는 당시 죽록정에서 멀리 무등산을 바라보면서 정자 앞에 흐르는 죽록천(竹綠川)을 바라보면서 굴원의 <어부사(漁父詞)>에서 나오는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 끈을 씻고, 창창의 물이 탁하면 내 발을 씻으리[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라는 말을 되새기면서 자연을 벗삼아 살고자 한 그의 뜻을 알 수 있게 하는 작품이다.
그는 이곳에 머물면서 식영정(息影亭), 환벽당(環碧堂) 등을 왕래하면서 가사를 읊고, 많은 문사들과 교유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그의 작품을 비롯하여 송강정의 풍광을 읊은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후손인 정재, 정해길(鄭海吉), 정득원(鄭得源) 의 작품 등이 새겨진 총 9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전남대 호남한문고전연구실에서는 문화재 보존의 하나로 시민의 소리와 함께 광주․담양의 8대 누정으로 선정한 독수정, 면앙정, 명옥헌, 소쇄원, 송강정, 식영정, 풍암정사, 환벽당에 걸린 모든 현판을 탈초 및 번역했다. 아울러 중국 관광객을 위한 누정홍보영상이 포함된 도록집 간행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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