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차가 주인인 도시, 나는 걷고 싶다
책이야기-차가 주인인 도시, 나는 걷고 싶다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7.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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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행복 / 이브 파칼레 지음>

서점에 갔다가 눈길을 끄는 책을 한 권 발견했다. <걷는 행복>.
프랑스의 동식물학자인 이브 파칼레가 지은 이 책은 그야말로 걷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풀어놓은 책이었다.

여섯 살 때 아버지와 함께 산을 오른 후부터 걷기 예찬자가 되었다는 파칼레는 우리가 어디에 있건(그것이 교차로이건, 임시정류장이건, 우연한 갈림길이건 간에) '걷는 행복'을 누릴 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영화 <편지>의 무대가 되었던 '아침고요수목원'에서의 걷기, 내소사 입구의 전나무길 걷기, 새벽안개가 낀 내장사의 단풍나무 터널 걷기...... 생각만 해도 아름답고 행복하다. 걷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다.

그러나, 도시에서의 걷기는 별로(좀더 솔직히 말하자면 <전혀>) 행복하지 않다. 골목길마다 빽빽이 주차된 차들, 주차된 차들 사이로 곡예운전을 하는 마을버스(광주에서 살 땐 몰랐는데, 서울은 이런 마을버스가 참 많다). 가끔 유모차를 밀고 시장이라도 가는 날은 정말 목숨을 건다. 우리 집에서 대형 마트까지 가는 길은 2차선 도로를 따라 한 10분 걸어야 하는데, 차선만 선명하게 확보가 되어 있다. 나와 내 아이의 유모차는 배수로 위로 위태롭게 걸어야 한다.

절반쯤 가면 사정이 좀 나아져서 한쪽에 인도가 있다. 그렇지만, 유모차를 밀고 가기엔 보도블럭이 고르지 않아 난 차도를,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배수로 뚜껑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파칼레는 '걷는다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은유'라고 했는데, 그 부분을 읽은 후 시장을 가면서 갑자기 너무 슬퍼졌다. 아, 내 인생이 이것밖에 안되나, 내 인생은 이렇게 목숨 걸고 한발 한발 내딛어야 하는, 이것밖에 안되나...

취재를 하면서 알게 된 한 시민단체가 있다. 이름이 너무 좋아서 잊을 수가 없다. <걷고 싶은 도시를 만들기 위한 시민 연대>
그 이름만 들어도 갑자기 상쾌해진다. 도시가 걷고 싶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름드리 나무들이 우거져 있고, 공기도 상쾌하고, 주변엔 볼거리도 많아서 그냥 산책을 하면서 행복해질 수 있는 그런 도시.

이브 파칼레는 '도시에서든 자연에서든, 또는 지구의 어느 끝자락에서든, 내가 가는 길모퉁이에서는 모든 산책이 누군가를, 또는 무엇인가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한 남자에게, 여자에게, 아이에게, 동물에게, 꽃에게, 바위에게, 구름에게, 별에게 인사하는 기회가 된다'고 했다.

'나는 꼭 한국에 갈 것이다'고 서문에 밝힌 그가 한국에서 걸을 때 무엇을 보고 누구에게 인사를 할까. 달리는 자동차와 그 자동차가 뿜어대는 매연과 그 매연에 찌든 얼굴들...

그는 부산과 서울을 비롯한 여러 도시들과 시골 마을, 동해안을 걷고, 동해안의 푸른 물을 만지고, 아름다운 수묵화가 품고 있는 소나무를 배경으로 심호흡을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와 <오우가>를 읊었다. 아마 길의 주인이 사람이었던 시절을 그는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 유모차를 밀고 산책을 할 수 있는 그런 곳에서 살고 싶다. 몇 달 후, 우리 아이가 걸음마를 할 때, 목숨 걸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곳에서 살고 싶다. <걷는 행복>을 읽고 난 역설적으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우리네 걷기'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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