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누정문화의 재조명4 - 누정과 문학
호남 누정문화의 재조명4 - 누정과 문학
  • 전남대 호남한문고전연구실
  • 승인 2015.12.03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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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소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창의주도형 지원사업의 하나로 호남의 누정문화를 새롭게 알아보는 자리를 마련한다. 누정문화가 단순히 옛 선조의 장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에 되살려 우리의 신문화로 정립할 수 있는 창의적인 접근을 시도할 것이다. 이번 기획에는 전남대 호남한문고전연구실이 함께 했다. <편집자주>


④ 소쇄원

조선 최고의 민간정원 원형을 간직한 소쇄원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에는 조선 최고의 민간정원인 소쇄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 원림은 조선 전기 문신인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기묘사화가 일어나 스승인 조광조(趙光祖)가 사사되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이곳으로 내려와 지은 것이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원림으로 500년에 가까운 역사를 담고 있는 만큼 전통원림의 고유성을 간직하고 있는 원림 중 하나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원래 소쇄원은 1519년경 양산보에 의해 소쇄정(瀟灑亭)이라는 초정의 형태였으며, 그의 아들 양자징(梁子徵, 1523~1594)과 양자정(梁子渟, 1527~1597) 등에 의해 점차 원림 형태로 자리를 잡아나갔다고 전한다.
비록 1597년에 일어난 정유재란으로 인해 소쇄원이 소실되기도 하였지만, 그의 손자인 양천운(梁千雲, 1568~1637)을 비롯한 후손들에 의해 좀 더 구색을 갖춘 원림으로 확장해 나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같은 내용은 《소쇄원사실(瀟灑園事實)》이라는 서책을 통해서도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이 서책은 양산보부터 후손인 양택지까지 6대손의 시문, 그리고 이들과 교유한 문사들의 시문이 수록되어 있다. 이 때문에 개인의 문집이기 보다는 가문대대로 내려오는 선조들의 문집을 모아 편찬한 세고(世稿)에 속한다. 비록 유실된 시문들도 없진 않으나, 소쇄원과 관련한 내용의 전말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밖은 온화하고 안은 엄격한 군자, 양산보

양산보는 스스로 ‘소쇄옹’이라 이름하고 여러 문사들과 교유하였는데, 그 인물들은 그의 외종인 송순(宋純)을 비롯한 임억령(林億齡), 김윤제(金允悌), 김인후(金麟厚), 김성원(金成遠), 기대승(奇大升), 고경명(高敬命), 정철(鄭澈) 등이다.

그의 13세손인 양승종(梁昇鐘)이 1986년에 지은 〈소쇄원기(瀟灑園記)〉에는 하서 김인후 선생은 “형의 예로 섬기며 눕거나 서서도 정밀하게 생각하고 천지조화의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네.”라고 하였고, 고봉 기대승 선생은 “공은 밖은 온화하지만 안은 엄격하니 그를 바라보면 나도 모르게 무릎이 굽혀진다.”라고 하였으며, 송강 정철 선생은 “공과 상대함에 사람으로 하여금 상쾌한 회포를 갖게 한다.”라고 하였다.

제봉 고경명 선생은 “선생은 사람됨이 위대하고 성품 또한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여 보는 자가 모두 덕이 있는 군자라고 칭송하였다.”라고 하였으며, 현석 박세채 선생은 “선생은 정암[조광조의 호]의 문하에 하나의 큰 별이다.”라고 한 말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당시 그의 삶을 조금이나마 유추할 수 있다.

다양한 볼거리로 가득한 소쇄원

소쇄원 원림에는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먼저 소쇄원 입구에 들어서면 먼저 대봉대(待鳳臺)가 보인다. 대봉대는 양산보가 운둔하며 현인들과 교유하며 정의로운 세상의 성군(聖君)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조성하였다고 전하는데, 주로 손님을 맞이한 장소였다고 한다.

그리고 대봉대를 지나면 오른쪽에 겨울의 북풍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 애양단(愛陽壇)이라고 새겨진 담장도 보인다. 그 담장 아래 터진 구멍으로 흘러든 물이 암반위에서 다섯 굽이를 이룬다고 해서 붙여진 오곡문(五曲門)이 있다. 특히 이 담장을 괸 돌은 선녀가 베를 짜던 베틀바위인 지기석(支機石)이라 하여 사람들은 매우 신성하게 여겼으며, 지금의 지석마을이라는 마을이름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양언진(梁彦鎭) 형의 정자를 방문하다[訪梁兄彦鎭林亭 四十八詠河西金厚之]〉라는 제목의 현판에는 48 수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아래의 작품은 그 중 한 작품이다.

은행나무 그늘아래 굽이도는 물 杏陰曲流

지척이 졸졸졸 물 흐르는 곳이니 咫尺潺湲地
분명 다섯 번 굽이쳐 흘러가는데 分明五曲流
당시 공자가 냇가에서 한 말씀을 當年川上意
오늘 이 은행나무 가에서 보네야 今日杏邊求

《논어》 〈자한(子罕)〉편을 보면 “공자가 시내 위에서 말씀하셨다. ‘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밤낮을 그치지 않는구나.”라고 한 말이 있다. 이는 도를 닦는 일도 또한 이러해야 함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하서 김인후도 오곡문에 흐르는 물을 보고 불연 듯 공자의 말이 떠올랐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게 애양단을 지나면 원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제월당(霽月堂)이 나온다. 제월당은 ‘비 개인 하늘의 밝은 달[霽月]’이라는 뜻으로, 주인을 위한 집이다. 여기에는 위에서 언급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가 당시의 소쇄원을 보고 지은 〈소쇄원사십팔영시〉 가 현판 2개로 나뉘어 걸려 있다. 소쇄원에는 1755년에 그의 양학겸 목판으로 판각한 〈소쇄원도(瀟灑園圖)〉가 있는데, 〈소쇄원사십팔영시〉를 참고하였다고 한다.

제월당 바로 아래에 위치한 광풍각(光風閣)은 ‘비 갠 뒤에 부는 온화한 바람[光風]’이라는 뜻으로, 손님을 위한 사랑방이다. 여기에는 1924년 후학 오준선(1851~1931)의 〈광풍각중수기(光風閣重修記)〉가 걸려 있는데, “선생의 후손 인묵(仁默)이 개연히 감흥을 일으켜 종친 재익(在益)과 의논하여 자기의 집안 재산을 덜어서 수리함에 주춧돌과 섬돌은 그대로 두고 동우(棟宇)를 새롭게 했다는 내용과 인묵의 맏아들 재윤(在潤)이 오준선에게 기문을 부탁했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참고로 현재의 건물은 2003년 태풍으로 붕괴된 것을 같은 해에 복원한 것이다.

소쇄원은 전남 여행에 있어 빠지지 않은 명소 중의 하나이며, 현재 국가 사적 304호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그 어느 때 보다 지속적인 원림의 원형보존에 더욱 더 노력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전남대 호남한문고전연구실에서는 문화재 보존의 하나로 시민의 소리와 함께 광주?담양의 8대 누정으로 선정한 독수정, 면앙정, 명옥헌, 소쇄원, 송강정, 식영정, 풍암정사, 환벽당에 걸린 모든 현판을 탈초 및 번역했다. 아울러 중국 관광객을 위한 누정홍보영상이 포함된 도록집 간행을 앞두고 있다.

http://www.memoryho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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