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누정문화의 재조명3 - 누정과 문학
호남 누정문화의 재조명3 - 누정과 문학
  • 전남대 호남한문고전연구실
  • 승인 2015.11.26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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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소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창의주도형 지원사업의 하나로 호남의 누정문화를 새롭게 알아보는 자리를 마련한다. 누정문화가 단순히 옛 선조의 장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에 되살려 우리의 신문화로 정립할 수 있는 창의적인 접근을 시도할 것이다. 이번 기획에는 전남대 호남한문고전연구실이 함께 했다. <편집자주>

③ 명옥헌

소박하면서도 아늑한 민간정원

▲명옥헌 전경 사진 (백일홍 피어 있는 사진 활용)
명옥헌은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에 위치한 것으로, 조선 중기 문신인 명곡(明谷) 오희도(吳希道, 1584~1624)가 지냈던 곳으로, 아들 오이정(吳以井, 1619~1655)이 부친을 기리기 위해 지은 것이다.

당시 오희도는 어머니를 따라 외가가 있던 이곳에‘망재(忘齋)’라는 집을 짓고 글을 읽으며 지냈다. 그리고 인조반정 후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있다가 1년 만에 천연두로 생을 마감하였는데, 그 후 30여 년이 지난 1652년 무렵에 넷째 아들인 오이정(吳以井) 등이 아버지가 살던 터에 이 정자를 짓고, 아래 위 두 곳에 못을 파고 배롱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현재의 배롱나무는 최소 300년 이상 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으며, 명옥헌 원림 안에는 작은 계곡물과 연못과 어우러져 소박하면서도 아늑함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이곳은 7~8월에 만발한 백일홍의 전경이 더해 소쇄원과 함께 아름다운 민간 정원으로 손꼽히며 현재 전라남도기념물 제44호와 명승 제58호로 지정되어 있다.

더러운 때를 씻기고 청량한 기운을 내뿜는 곳, 명옥헌

▲명옥헌 현판과 ‘鳴玉軒 癸丑’이라고 새겨진 바위 모습
처음 ‘명옥헌’이라는 이름은 우암 송시열이 당시 정자 뒤에 흐르는 물소리가 마치‘옥구슬이 부딪치는 것[鳴玉]’과 같다고 하여 지은 것으로 전한다. 누정 옆의 작은 계곡 위쪽에 자리한 바위에‘명옥헌 계축(鳴玉軒 癸丑)’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지금도 확인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우암 송시열의 필체이며, 현재 누정의 편액의 필체가 그것을 모각(模刻)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기암(畸庵) 정홍명(鄭弘溟)의 〈명옥헌기(鳴玉軒記)〉에서도 당시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어 조금이나마 그 상상할 수 있게 한다.

내 문도 가운데 오명중(吳明仲)이라는 이가 있는데 본래 냉철하고 강개하여 전원에서 지조를 지키며 세상에서 구차한 삶을 구하지 아니하고 비로소 뒷산 기슭에 들어가 두어 칸 작은 집을 지었다. 집 뒤에는 한 줄기 차가운 샘이 있어 콸콸 울타리를 따라 연못으로 들어갔는데 그 소리가 마치 옥이 깨지고 구슬이 떨어지는 것 같아 사람들로 하여금 그 소리를 듣게 하면 자신도 모르게 더러운 때가 씻기고 청량한 기운이 엄습해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매양 고요한 밤 한가한 시간에 자는 듯 마는 듯 눈을 감고 있으면 상쾌한 기운이 옷소매에 적시고, 서늘한 안개가 자리를 적시니 황연히 내 몸이 하늘나라 궁전과 비빈(妃嬪)들이 거처하는 전에 이른 듯하며, 밤이슬을 호흡하면 옥구슬을 탐하여 들어 삼키는 것 같았다.

▲삼고 현판
능양군의 은택을 입은 오동나무와 은행나무

명옥헌에는 삼고(三顧)라는 현판이 하나 더 있다. 이는 삼고초려(三顧草廬)에서 비롯된 것으로, 조선 16대 임금인 인조(능양군)가 광해군을 축출하기 위한 세력을 규합해나가는 과정(인조반정)에서 당시 낙향해 있던 오희도를 몇 차례 찾아와 자신의 뜻을 전했다는 고사를 담고 있다. 오희도의 7세손인 오상순(吳相淳, 1749~1799)은 장계고동기(藏溪古桐記)에서 위의 고사와 관련한 오동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담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명곡(明谷) 오희도(吳希道) 선생은 혼조를 만나 두문불출한 것이 십년이다. 도를 지키고 자취를 감추고서 이름난 시냇가에서 평소 아끼던 나무를 심으셨다. 인조대왕이 인륜을 바르게 하자는 논의를 당하여 초야에 은둔한 선비를 모을 적에 정승 원두표(元斗杓, 1593∼1664)와 시냇가에 행차하여 오동나무 아래 말을 매어놓는 것이 지금 거의 200여년인데 완연하게 한 자리에서 만나는 것처럼 풍운이 머무르고 몇 그루 오동나무가 벽옥을 띠었으니 어찌 천지의 원기를 부지하고 귀신의 조화를 배양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찌 단명하지 않고 장수 하겠는가? 진실로 기이한 것 가운데 최고 기이한 것은 우리 집 북쪽 동산에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또한 인조대왕이 말을 매는 은택을 입었다. 오래되고 기이한 것이 장계의 오동나무와 다름이 없기에 마침내 느낌을 아울러 기록한다.

▲은행나무
안타깝게도 현재 위의 오동나무는 고사(枯死)하고 없으나, 그와 비슷한 시기의 은행나무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데, 그 은행나무는 높이 30m 이상, 지름은 약 8m에 달하며, 현재 전라남도 기념물 제 45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현재 명옥헌에는 총 14개의 현판이 걸려있는데, 그 중 각 기둥에 10판의 주련이 걸려 있다. 다만, 그 작품을 누가 언제 어떠한 기준으로 선정하여 주련으로 제작했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그 작품으로는 고려 인종 때의 문신인 이지저(李之氐), 김병연(金炳淵), 전봉준(全琫準),강항(姜沆)이 왜에 체류시 제자였던 왜승 순수좌(舜首座), 조선 후기 여류시인 박죽서(朴竹西), 청나라의 정치가 원세개(袁世凱), 작지미상의 작품 등의 일부가 수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누정 바로 뒤편에는 1825년에 창건되어 지방의 이름난 선비들을 제사지내던 도장사(道藏祠)가 있었는데, 그 사당은 1868년 대원군 때에 철폐되었으며, 현재 도장사유허비가 그 터를 지키고 있다.

전남대 호남한문고전연구실에서는 문화재 보존의 하나로 시민의 소리와 함께 광주․담양의 8대 누정으로 선정한 독수정, 면앙정, 명옥헌, 소쇄원, 송강정, 식영정, 풍암정사, 환벽당에 걸린 모든 현판을 탈초 및 번역했다. 아울러 중국 관광객을 위한 누정홍보영상이 포함된 도록집 간행을 앞두고 있다.

http://www.memoryho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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