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을 돌다(10)
무등을 돌다(10)
  • 이종범 조선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 승인 2015.11.26 10: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무등산 원효사 내려와 이치마을 길목에 김덕령 장군을 모신 충장사가 있습니다. 충장은 1788년 정조가 내린 시호입니다. 17세기 후반 광주 서창 방면에 있었던 의열사(義烈祠)에 처음 모셨습니다.

왜란이 일어나자 의병도청(義兵都廳)을 두고 제봉 고경명과 건재 김천일에게 많은 장비와 군량을 조달하였던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의 후손들이 조성한 사우였습니다.

그러다가 1871년 전라도에서는 태인의 무성서원, 장성의 필암서원, 광주의 포충사를 제외한 모든 서원ㆍ사우가 훼철될 때 없어졌다가, 1975년 장군과 선대의 묘역이 있던 이곳에 새로 조성되었습니다. 그때 긴급조치로 겨울공화국을 연출하였던 그 사람의 참배에 지역 언론이 무척 떠들썩하였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장군은 1567년 무등산 아래 석저촌 지금의 충효동, 왕버들나무 뒷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조부는 호조정랑을 지내고 부친은 천문, 의학, 병학의 전문지식이나 외교에 필요한 한어(漢語)와 이문(吏文) 등을 가르치는 습독관(習讀官)을 지냈는데, 습독관이 배치된 관상감ㆍ전의감ㆍ훈련원ㆍ사역원ㆍ승문원 중에서 어디에 근무하였는지는 아리송합니다. 재산 넉넉한 집안에서 교육 환경도 좋았습니다.

어린 시절 환벽당 주인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의 무릎에서 재롱떨고 식영정 주인 김성원(金成遠)을 자주 찾았으며 지실마을 송강(松江) 정철(鄭澈)을 간혹 만났을 것입니다. 김윤제는 종조부, 김성원은 당숙, 정철은 김윤제의 외손녀 즉 고종육촌 누이와 결혼하였으니 굳이 촌수를 따지면 6촌 매형이 됩니다.

문장과 학식으로 청류(淸流)의 선봉으로 이름을 날린 정철은 말할 나위가 없지만, 김윤제도 1531년(중종 26) 문과, 김성원은 1558년(명종 13) 생원이었습니다. 참고로 문과는 3년마다 33인, 생원과 진사 또한 3년 정원이 각 100인이었으니 문장과 학문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고 할 것입니다.

또한 소쇄원을 조성한 양산보의 아들과 손자 즉 양자징(梁子澂)과 양천경(梁千頃)ㆍ천회(千會) 형제, 그리고 자주 식영정을 왕래하였던 제봉 고경명 등을 자주 만났을 것입니다. 이들 역시 그리 멀지 않는 인척입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란 장군에게 공부의 길은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일찍이 미암 유희춘에게 배운 열두 살 많은 매형 김응회(金應會)은 1585년 생원이 되고 우계 성혼의 문하에 출입하였습니다. 당대 서인의 이론적 지주였지요. 장군도 형 김덕홍(金德弘)와 같이 어린 시절 우계를 스승 삼았다는데,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없지만 어쩌면 매형을 따라서 파주까지 갔을지 모릅니다.

장군도 한동안 광주 향교에서 공부하였습니다. 즉 교생이었던 것이죠. 그러나 유생(儒生)과 생소한 다른 방면, 신력(神力)으로 유명하였습니다. 범을 만나 화살을 날리고 창을 던져 잡을 만큼 담대한 용력을 자랑하고, 말에서 몸을 날려 누각에 뛰어올랐다가 다시 말을 잡아탔을 만큼 날쌨다고 합니다. 언젠가 그네 뛰던 음력 오월 닷새 단오에 장성의 씨름판에 갔다가 누구도 덤비지 못하는 우람한 장사를 거꾸러뜨렸다는 일화도 전합니다.

여기에서 가볍고 날쌔다는 ‘협(俠)’의 의미를 새기고 싶습니다. 󰡔설문해자󰡕에 따르면 ‘협’은 재물을 가볍게 아는 ‘경재(輕財)’라는 뜻이며, 옳을 ‘의(義)’와 소리가 비슷하답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재물, 권세에 얽매이지 않고 호방하게 나누고 미련 없이 떠나는 사람을 ‘협객(俠客)’ ‘협사(俠士)’ ‘호협(豪俠)’ ‘의협(義俠)’이라고 하였습니다. 󰡔수호지󰡕의 송강은 ‘협주(俠主)’입니다.

‘협’이 그리운 세월입니다. 상위 10%가 국부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하위 50%는 겨우 2%에 목을 매고 있습니다. 상위 10%의 독식과 세습, 하위 50%의 절망과 포기! 그런데 40% 중간층은 각자도생(各自圖生)하며 방관과 굴종을 선택하는 듯싶어 아련합니다. 아니 무섭습니다!

‘협’이 아니면 어떻게 ‘의’를 세울 수 있으며, ‘장(將)’이 재물을 부둥켜안고 인색하다면 어떠한 ‘병(兵)’이 따르겠습니까! 의병, 독립군, 의열단은 서로 ‘협’으로 묶였던 것입니다. 미증유의 전란 임진왜란 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의 충장공을 ‘유협(儒俠)’이었다고 기억하고 싶습니다.


최신 HOT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