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누정문화의 재조명2- 누정과 문학
호남 누정문화의 재조명2- 누정과 문학
  • 전남대 호남한문고전연구실
  • 승인 2015.11.19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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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소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창의주도형 지원사업의 하나로 호남의 누정문화를 새롭게 알아보는 자리를 마련한다. 누정문화가 단순히 옛 선조의 장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에 되살려 우리의 신문화로 정립할 수 있는 창의적인 접근을 시도할 것이다. 이번 기획에는 전남대 호남한문고전연구실이 함께 했다. <편집자주>

② 면앙정(俛仰亭)

명산의 정기를 이어받은 면앙정

면앙정은 전라남도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에 있는 누정으로, 1533년 조선중기 문신인 송순(宋純, 1493~1582)이 그의 나이 41세 되던 해에 잠시 관직을 버리고 향리로 내려와 지은 것이다. 누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가운데에 방을 두고 사방이 마루로 되어 있어 정자의 어느 쪽이나 주변 경관을 바라다 볼 수 있으며, 누정의 전면으로는 무등산을, 후면으로는 추월산․병풍산 등을 대하고 있어 여러 산들의 정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듯하다.

이 누정은 조선 초의 독수정과 1530년의 소쇄원 다음으로 담양에서 세 번째로 세워진 것으로, 면앙정의 편액은 조선 중기의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부친인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1498~1564)의 필체이다. 당시 성수침은 조광조의 문인으로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을 단념하고 두문불출하였는데, 송순은 이 글씨를 받기 위하여 그가 거주하였던 파주까지 찾아갔다고 한다.

굽어보면 땅이 있고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면앙정이라는 누정 이름의 의미는 <면앙정기>를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여기에는 “굽어보면 땅이 있고 우러러보면 하늘이 있는데, 이 언덕에 정자를 지으니 그 흥취가 호연(浩然)하다. 풍월을 읊고 산천을 굽어보니 또한 나의 여생을 마치기에 족하다.”는 송순의 말이 있어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면앙정은 송순의 호(號)이면서 누정이 이름이기도 한데, <면앙정 삼언가> 라고 불리는 작품에서도 그 내용이 잘 드러나 있다.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俛有地 仰有天
면유지 앙유천
그 가운데 정자 지으니 흥겹지 않겠나
亭其中 興浩然
정기중 흥호연
풍월도 맞이하고 산천마저 둘렀으니
招風月 揖山川
초풍월 읍산천
명아주 지팡이 짚고 백 년을 보내리라
扶藜杖 送百年
부려장 송백년


‘면앙’이라는 말은《맹자(孟子)》〈진심(盡心)〉장의 ‘군자삼락(君子三樂)’중에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앙불괴어천(仰不怪於天) 부부작어인(俯不作於人)]”이라는 구절에서 취한 것이라고 전하는데, 이 때문에 예전부터 면앙정은 ‘부앙정’으로 바꾸어 불려야 된다는 이견도 있다.

시가문학을 꽃 피운 호남의 대표적 시인, 송순

면앙정에는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지은 <면앙정기(俛仰亭記)>가 새겨진 현판이 걸려 있는데, 여기에는 “누정의 터는 갑신년(1524)에 얻었고, 누정을 짓기 시작한 것은 계사년(1533)이었으며, 그 후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임자년(1552)에 이르러 중건하였다.”고 되어 있어 그 시기를 알 수 있다. 여기에서 그는 1524년 처음 누정의 터를 같은 마을 곽씨에게서 사들였다고 하는데, 이러한 과정에 얽힌 일화가 있어 흥미를 더한다.

정자의 옛터는 곽씨(郭氏) 성을 가진 자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일찍이 꿈에 의관(衣冠)을 갖춘 선비들이 자주 와서 모이는 것을 보고는, 자기 집에 장차 경사가 있을 조짐이라고 생각하여, 아들을 산사(山寺)의 승려에게 부탁해서 공부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가 성공하지 못하고 빈궁하게 되자 마침내 그곳에 있는 나무를 베어 버리고 사는 곳을 옮겼다. 공(송순)이 재물을 주고 이곳을 사서 얻자, 마을 사람들이 모두 와서 축하하기를 “곽씨의 꿈이 징험이 있다.” 하였으니, 이것은 조물주가 신령스러운 곳을 감추어 두었다가 공에게 준 것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하나의 일화이긴 하지만 곽씨라는 한 인물의 징험대로 오늘날 송순은 눌재(訥齋) 박상(朴祥)의 제자로, 길재(吉再)-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박상(朴祥)으로 이어지는 정통 사림학통을 계승한 인물이기도 하며, 시가문학에 꽃을 피운 호남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평가 받고 있는 만큼 송순을 있게 한 신령스러운 곳임에는 틀림없는 듯하다.

문사들이 남긴 주옥과 같은 시문

면앙정은 1552년 처음 누정이 창건된지 약 20년 후에 당시 담양부사였던 오겸(吳謙)이 도움으로 중건되었는데, 이 때 중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초대된 많은 문사들은 뛰어난 시문들 남겼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기대승의 <면앙정기>, 임제(林悌)의 <면앙정부(俛仰亭賦)>, 임억령(林億齡)・김인후(金麟厚)・고경명(高敬命)・박순(朴淳)의 <면앙정 30영>・이황(李滉)・소세양(蘇世讓)・양산보(梁山甫)의 차운시 등이 있다. 그러나 정유재란(1597)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당한 면앙정은 빈터만 남게 되고 여러 문사들이 남긴 시문이 소실되었다는 그의 문집인 <면앙집>의 연보의 기록을 통해 더 많은 문사들의 시문들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누정에는 면앙정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편액을 비롯한 송순의 <면앙정 삼언가>와 <면앙정 원운시>, 이안눌의 <차벽상운(次壁上韻)>, 임억령・김인후・고경명・박순의 <면앙정 30영>, 양산보의 <면앙정 차운시>, 담양부사를 지낸 황수의<次板上韻>, 임광필의 <증주인(贈主人)>, 윤두수의 고손(高孫)인 윤세관의〈면앙정 병서(俛仰亭 幷序)〉, <어제(御製)>와 <효사당기(孝思堂記)>와 <제승정기(濟勝亭記)>, 그리고 <차제승정운(次濟勝亭韻)>이 함께 새겨진 현판 등 총 15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특히 임제(林悌)가 지은 <면앙정부(俛仰亭賦)>의 현판은 걸려있지 않은데, 이 또한 전쟁으로 인해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어 안타까움이 더한다. 더 이상 소실되지 않도록 관리가 필요하며, 특히 면앙정의 현판들은 다른 누정의 현판들에 비해 역사가 오래된 만큼 현판 상태가 좋지 않아 대책 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전남대 호남한문고전연구실에서는 문화재 보존의 하나로 시민의 소리와 함께 광주․담양의 8대 누정으로 선정한 독수정, 면앙정, 명옥헌, 소쇄원, 송강정, 식영정, 풍암정사, 환벽당에 걸린 모든 현판을 탈초 및 번역했다. 아울러 중국 관광객을 위한 누정홍보영상이 포함된 도록집 간행을 앞두고 있다.

http://www.memoryho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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