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이 흩날리던 날
낙엽이 흩날리던 날
  • 문틈 시인/시민기자
  • 승인 2015.11.17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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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가고 있다. 저기, 산마루를 넘어서 가을이 휘적휘적 가고 있다. 그때도 가을은 갔다. 스무 살이 아직 안되었을 때 가을은 쿵, 쿵, 소리를 내면서 가슴을 딛고 산고개를 넘어갔다.
이 가을은 그때의 가을이 아니다. 퇴각하는 주둔군처럼 가을은 이제 가야 할 곳으로 가고 있다. 무척 아쉽고 안타깝다. 아무리 손을 내뻗어 잡으려 해도 가을은 실을 놓친 연처럼 멀어져가고 있다. 이미 나이가 들만큼 들어버린 사람에겐 가을은 그렇게 도망가듯 가는 모양이다. 그래도 어찌할 수 없다. 다만 바라볼 뿐.

빈 들녘, 낙엽 진 가로수들, 낙엽으로 깔린 숲길, 무엇인가 한 바탕 큰일을 치르고 난 흔적처럼 가을이 머물다 간 자리는 뚜렷하다. 그 자리에 서서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가녀린 슬픔을 느낀다.
그득 차 있던 것이 텅 비어버린 듯한 이 애틋한 마음자리를 그 무엇으로 위로를 할 수가 있을 것인가. 두 팔로 허공을 감싸 안아 본다. 낙엽이 흩날려 꽃이파리처럼 가슴에 안긴다. 그럴 수만 있다면 저무는 낙엽들 한 잎 한 잎에게 인사를 전하고 싶다. 너희들은 장하다고. 큰일을 마치고 가는 것이라고.

언젠가 해남의 한 산사에서 잠 못 이루며 밤새도록 듣던 낙엽 구르는 소리가 지금에사 가을이 가는 소리였음을 알아챘다. 해종일 이 도시의 변두리 정원을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낙엽 밟는 소리가 좋아서가 아니다.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것 같은, 무엇인가의 이름을 소리쳐 불러야만 할 것 같은, 가슴이 먹먹해서 병 든 개처럼 마실을 돌았다.
그리고는 노오란 은행잎을 한 잎 주워 가지고 읽던 책갈피에 넣어두었다. 그것은 계절이 날린 삐라 같은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 전단지에는 노오란 색 바탕에 줄무늬가 져있고, 줄무늬 사이사이에 글자들이 암호처럼 쓰여 있는 것만 같다. 이것 역시 상상이다. 암호해독기로 읽는다면 필시 가을의 행로를 짚어볼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을 열심히 산 사람은 죽음이 두렵지 않을 것이고, 인생을 허투루 산 사람은 죽음이 큰 문제가 될 것이라고, 그때 요양소를 위문하러 온 한 무리의 여고생들 중 누군가가 누군가의 글을 읽어주었던 날도 가을이었다.

이 우주의 이 작은 별에 태어날 때 이미 알고 있었다. 모든 생명 있는 것은 언젠가는 종말에 이른다고. 그리나 모든 생명의 목적이 종말에 있지 않고 그 성숙에 이르는 과정에 있다고. 낙엽들은 포도鋪道  위를 함부로 뒹구는 것이 아니다.
낙엽들은 어느 잎이라도 화려한 내력과 목적을 갖고 그 행로를 지내왔다. 사실 그것은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의 행로이다. 그렇잖은가.

대단원의 막이 내리고 그것을 기념이라도 하듯 작별의 퍼포먼스를 하는 낙엽의 분분한 낙하를 조용히 마음을 다스리며 바라볼 일이다. 안타까움, 아쉬움, 슬픔을 지긋이 누르고 가을의 종언을 지켜보는 것.
시인 보들레르가 모든 것을 상징으로 보았듯이 어느 것 하나 저기, 포도를 굴러가는 낙엽도 삼라만상의 이치를 표상하는 것으로 말이다. 그러노라면 이 우주의 질서 속에서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순종하는 것들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 오기 전부터 이미 우리를 인도한 거대한 손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가을에 낙엽이 지는 것은 ‘잎의 엽록소가 파괴되고 남아있는 영양분과 효소의 작용으로 노란색이나 붉은색으로 변한다. 이후 더 이상 수분을 공급받지 못하는 잎은 바싹 말라 나무줄기에 붙어 있지 못하고 떨어진다.’라고 교과서는 쓰고 있다.
하지만 더 깊은 실상은 우주의 원리, 즉 생성과 소멸의 법칙을 따름으로써 우주의 질서에 순응하는 과정을 한 잎 한 잎이 보여주는 드라마라는 사실이다. 삶과 죽음은 서로 포개져 있으므로 이를 분리할 수가 없다는 이치를 말이다.

잘 들어보면 낙엽들 한 잎 한 잎이 대지에 떨어질 때마다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우주가 작동하는 소리이리라. 낙엽이여, 네가 가는 곳이 어디메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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