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재상, 이항복 (2)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재상, 이항복 (2)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5.11.12 17: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608년에 광해군(1575-1641)이 즉위하였다. 광해군은 즉위 관련하여 시련이 많았다. 1606년에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낳았기 때문이다. 선조는 내심 두 살 밖에 안 된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다.

광해군 시대는 역모와 음모로 얼룩진 광풍의 시대였다.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친형 임해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낸 후 1609년에 죽였다. 1613년 4월에는 칠서의 옥을 일으켜 박순의 서자인 박응서의 역모 자복을 근거로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냈다.

이항복은 6월15일에 역모에 연루된 정협을 등용한 일로 사직하고 서울 북쪽 노원에 동강정사를 짓고 동강노인으로 자처하면서 초야에 묻혔다.

영의정 이덕형만 조정에 홀로 남아 광해군의 폐정을 막아보려 했으나 그 역시 탄핵당하여 시골에 있다가 1613년 10월에 별세하였다.
이항복은 너무 슬펐다. 그는 이덕형의 시신을 직접 염하고 묘지명을 지어 애절함을 표현하였다.

1614년에 이이첨의 대북파는 기어코 영창대군을 죽였다. 그의 나이 8세였다. 그런데 대북파는 이에 멈추지 않았다. 1617년에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서궁(덕수궁)에 유폐하고 폐모(廢母)하려 하였다. 숭유(崇儒)의 나라 조선에서 폐모는 패륜(悖倫)이었다. 태종 임금이 이복형제를 죽이는 왕자의 난은 있었지만 어머니를 폐하는 일은 없었다.

대북파의 페모론 상소가 빗발치자 1617년 11월23일에 영의정 기자헌이 폐모론에 반대하고 나섰다. 11월24일에는 이항복이 “내가 이제야 죽을 곳을 찾았다.”라면서 상소를 올렸다. “춘추(春秋)의 대의(大義)에도 아들이 어머니를 원수로 여기는 의리가 없습니다. 더구나 자사(子思)는 ‘급(伋)의 아내는 곧 백(白)의 어머니다.’라는 말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하였다.

이항복이 상소한 ‘급의 아내는 곧 백의 어머니다.’는 인목대비는 선조의 계비이므로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어머니로 대접해야 하고 폐모하여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11월25일에 광해군은 창덕궁에서 폐모 논의를 하였다. 이 자리에는 전임자와 현직 그리고 종친 등 1,200명이 참석하였다. 폐모 논의는 찬성하는 쪽이 대세였다. 그런데도 신중파도 있었고, 반대는 못하고 침묵을 지키는 사람들도 있었다. 반대파는 기자헌, 이항복 등 몇 명에 지나지 않았다.

광해군은 쉽게 결론을 내지 못하였다. 이항복 같은 영향력이 막강한 원로대신들의 반대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이러하자, 이이첨등 대북파들은 폐모론을 반대한 이항복 · 기자헌 · 정홍익 등을 참형하라고 상소하였다. 이항복은 함경도 북청으로, 기자헌은 회령으로 귀양을 갔다.

이항복은 북청 유배 길에 철령을 넘으면서 시 한 수를 지었다.

철령 높은 재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삼아 띄워다가
님 계신 구중궁궐에 뿌려 본들 어떠하리.


이 노래가 어떤 경로로 전해졌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심지어 궁녀들까지 따라 불렀다.

1618년 1월, 1천 여 명의 신료(臣僚)들이 창덕궁 뜰에 모여 인목대비를 폐모하라고 요청하였다. 1월 28일,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더 이상 대비라 부르지 말고 ‘서궁(西宮)’으로만 부르라 명령했다. ‘서궁’은 ‘창덕궁의 서쪽에 있는 후궁’이란 뜻이다. 인목대비는 왕실의 최고어른인 ‘대비’에서 한갓 ‘후궁’으로 강등되었다.

이렇게 광해군은 연산군도 하지 않은 패륜을 저질렀고, 1623년 인조반정으로 폭군이 되었다.

1618년 5월 유배 중에 이항복은 꿈을 꾸었다. 선조가 정전(正殿)에 나와서 류성룡, 김명원, 이덕형이 함께 자리하였는데, 이덕형이 왕명으로 그를 부르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이항복은 “내가 세상에 오래 있지 못하겠구나.”라고 탄식하였다. 며칠 후 이항복은 세상을 떠났다. 영욕이 교차한 63세의 일생이었다.

이항복의 시신은 정충신(1576-1636)이 수습하였다. 정충신은 1592년 7월8일 권율이 금산 이치전투에서 왜군을 무찌른 소식을 평안도 의주의 이항복에게 전달한 전령이었다. 이후 정충신은 이항복 밑에서 일하면서 무과에 급제하였다.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는 금남군 정충신의 군호를 딴 도로명이다.

광해군 시대에 인륜이 무너질 때 이덕형과 이항복 그리고 이원익을 ‘혼조삼이(昏朝三李)’라고 일컬었다. 그 충성과 올곧음이 같기 때문이었다. 백사 이항복. 그는 정녕 인륜의 길을 걸은 명재상이었다.

최신 HOT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