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을 돌다(9)
무등을 돌다(9)
  • 이종범 조선대 교수
  • 승인 2015.11.05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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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까지 충민사에서 정묘호란 당시 안주성에서 순국한 전상의 장군의 흔적을 살폈습니다. 이제 길을 돌고 무등산 옛길 표지판을 따르면 원효사에 오릅니다. 조선시대 불교를 중흥한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이 잠시 찾아와서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꽃 휘날리니 바람이 잦아들고, 산 고요하여 새가 조잘대누나. 골짝 울림은 가야금 켜는 듯, 겹겹으로 뾰쪽 봉우리는 가지런하지 않네.” 불문에 들기 전 지리산에서 수도하던 청년 시절인지,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을 거부하고 자취를 숨기고 운수행각에 나섰던 때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서산대사의 고족이던 사명당 유정(惟政, 1544∼1610)도 선종 으뜸사찰이던 봉은사 주지를 사양하고 무등산을 찾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제봉 고경명이 사명당에게 건넨 시가 있지요. “봉은사 스님이 강남으로 온다는 소식, 멀리서 듣고 무척 놀라 성암에게 알렸다오. 매화도 늙으면 말라비틀어지는 법인데, 나 같은 사람이 무얼 감당할 수 있을까?” 1576년 즈음, 오래 동안 벼슬이 막힌 제봉이 아득하고 스산한 감회를 풀어내며, ‘남중제일시인’으로 이름을 알리던 시절이었지요.

당시 사명당은 한동안 원효사에서 주석하였던 사제(師弟) 영규(靈圭)를 만났을지 모릅니다. 영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산대사의 통문이 오기도 전에 고향 공주의 갑사를 중심으로 승병을 일으킨 의승장으로,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청주성을 회복하고 금산의 일본군을 공격하다가 산화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관군과 공조할 시간을 벌자면서 조헌을 만류하였건만, 결국 ‘중봉 혼자 죽게 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는군요. 임진년 8월 중순이었습니다.

중봉이 금산공격을 서둘렀던 것은 당초 제봉의 호남회맹군과 연합하여 금산성을 공격하자고 약조하였다가 자신이 호서의병을 제대로 동원하지 못하여 호남의병이 실패하였다는 자책감 때문이었습니다. 제봉과 중봉이 연대 합동의 과정에서 해광 송제민이 일정한 역할을 감당하였음은 운암서원에서 살핀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관계는 한날한시가 아니라 이미 깊었습니다. 제봉은 해광의 사촌 동서이면서, 해광을 토정 이지함에게 소개한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해광은 토정의 문하에서 중봉과 깊이 사귀며 ‘날이 차가워진 후에야 솔과 잣이 늦게 시드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공자를 말씀을 새기며 ‘세한계(歲寒契)’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토정과 제봉도 서로 통하는 사이였습니다. 1576년 겨울 토정이 뱃길로 순천으로 와서 무등산 증심사를 거쳐 제봉의 설죽산와(雪竹山窩)에 머물며 깊은 교감을 나누었고, 그때 토정은 ‘천명은 그침이 없다’는 뜻을 담아 ‘불이재(不二齋)’란 편액을 내리고 제봉 또한 그러한 다짐을 ‘명’에 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중봉 또한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듯 원효사는 임진의병사에서 잊을 수 없는 서산대사, 영규의 흔적이 촘촘합니다. 여기에 사명당과 제봉, 토정과 제봉의 만남까지 곁들인다면 의병운동의 밑그림을 보여주는 더할 나위없는 사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최근 주지이신 현지스님도 ‘생명나눔’과 ‘우리겨레하나되기’를 위하여 저 낮은 세상, 저 아픈 사람과 ‘함께’ 하시니 소중한 땅의 인연, 세월의 사연이 되살아나는가 싶습니다.

그런데 바로 원효사 골짝에 이름만 들어도 불끈하고 뭉클한 ‘비운의 의병장’ 김덕령(1568∼1596)의 주검동(鑄劒洞)이 있습니다. 칼을 만들고 내리쳤다는 설화가 전하지요. 이제 길을 원효사 아래 이치마을, 김덕령을 모신 충장사로 돌릴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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