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할아버지
길 잃은 할아버지
  • 문틈 시인/시민기자
  • 승인 2015.11.05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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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오는 시내버스가 어느 정류장에 멈추자 젊은 여성이 인쇄물을 한 묶음 쥐고 올라오더니 운전기사에게 부탁한다며 넘겨준다. 한 장 얻어 읽어보니 집을 나간 할아버지를 찾는다는 전단이다. 이름 박*식. 84세. 하얀 점퍼에 모자를 썼음. 치매 증상이 있음. 키는 1m64cm. 2단지 부근에서 실종. 보시는 분은 연락 바람. 전화번호.
그런 내용과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나가는 사진 한 장이 흐릿하게 찍혀 있다. 날짜를 보니 바로 당일이다. 갑자기 심장이 조여드는 느낌이다. 내일 아침에는 서리가 내린다는데 이 저녁에 할아버지는 대체 어디를 헤매고 다니고 있을까. 가족들은 또 얼마나 또 초조해할까.

보통 90세 가까이 살다보니 치매에 걸린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그런 탓인지 생기느니 요양병원이다.
레이건 전 미국대통령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알츠하이머에 걸렸을 때 그는 대국민 성명을 발표하고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 이제 가족 품에 돌아간다’고 했을 때 꽤나 마음이 아팠었다. 그 멋진 유머와 매력적인 표정, 근사한 옷차림, 통 큰 마음이 매혹되어 사나이로 태어날 바에야 저렇게 태어났어야 하는데 하고 부러워했었다. 그랬던 레이건이 두문불출하고 살다가 91세엔가 아내 낸시의 품에서 세상을 떠났다.

우리나라 고령인은 치매에 걸리면 대부분 요양원이나 요양병원행이다. 가족 품에서 지낸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전담해서 수발을 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거의 가능하지 않다. 아마 전단에 박힌 저 사람도 누가 지켜주지 못해서 혼자 밖으로 나갔다가 집을 못 찾고 헤매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고령의 아버지가 자식들을 잘못 알아보고 있는 장면이 나왔는데 참으로 안타까웠다. 대체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고령의 부모를 텐트에 남겨놓고 한 달 치 식량을 놓아두고 떠났다가 다시 와서 살아 있으면 또 식량을 놓아두고 떠돌아다니는 유목민, 그리고 ‘바렌’이라는 옛날 영화에서 보았지만 에스키모인들이 백곰이 어슬렁거리는 얼음판에 늙은 부모를 앉혀놓고 썰매를 타고 이주를 하던 모습이 눈에 밟힌다. 사람이 오래 사는 것이 축복이 아니고 가족의 재앙이 되어가고 있는 현실이 슬프고 서글프다.

그것도 슬프거니와 치매에 걸린 고령인을 가족들이 짐으로 여기는 현실은 너무 비참하다. 일평생 가족들을 위해 일하다가 가족들로부터 인생 말년에 그런 대접을 받고 산다는 것이 과연 인륜이 있는 세상이 할 짓인가. “빨리 세상을 떠나셔야 할 텐데 저렇게 세상을 떠나지 않고 오래 살고 있으니…” 하는 말을 요양병원에서 속삭이는 방문객들의 소리를 들을 때는 환자를 위문하러 온 사람들이 아니라 저승으로 데려가려는 저승사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언젠가 어떤 아들이 늙으셔서 거동을 못하는 아버지를 지게에 지고 방방곡곡 여행을 다닌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고 감동을 받았다. 치매를 앓고 있어서 사람 구실을 못한다 할지라도 가족은 그분을 돌봐야 한다. 치매를 앓으며 몇 년을 더 산다는 것을 무가치한 삶이라고 속으로 규정하지 말라.
멀쩡한 가족들이 치매를 앓는 부모를 돌보는 것은 그것 자체가 그 사람의 삶이다. 치매를 앓는 사람이나 그를 돌보는 가족이나 그것이 바로 인생을 사는 것이란 말이다. 만일 치매를 앓는 사람의 삶이 무가치한 것이라면 어떤 삶이 가치가 있단 말인가. 몸이 성한 사람만이 살 가치가 있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숨을 쉬는 한 사람은 그것으로 충분히 살고 있다. 나가서 돈을 벌지 않아도, 나가서 스타벅스에서 비싼 차를 마시며 쓰잘 데 없는 수다를 떨 수 없다고 해서 살아있다는 이 신비와 기적을 폄훼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시인 존 던은 노래한다. ‘누구든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은 아니다./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일부다./만일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가면 우리 땅은 그만큼 작아지며,/모래톱이 그리되어도 마찬가지다.
그의 몸에 피가 도는 한, 그가 코로 숨을 들이쉬는 한, 그것만으로 그는 인간으로서 존중을 받아야 한다. 그가 누워 있던 따뜻한 체온이 바로 당신의 체온이나 다름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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