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말 사잇길-'거시기'
전라도 말 사잇길-'거시기'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7.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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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사람들은 대개 감정을 드러낼 때 100%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70% 정도만 드러낸다.

몸이 아파서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에게 병 문안을 가면, 환자가 전라도 사람일 경우 어김없이 나오는 말이, '괜잖하다'(괜찮다)이다. 그러나 남들이 보기에는 심각한데도 '괜잖하다'고 한 그 사람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가는 곤란하다.

그런 경우는 자기 문제만이 아니라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 얘기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가령 공부를 아주 잘 하는 자식을 둔 부모에게 그 집 아이의 이름을 대며, '아그가 공부를 영판 잘 한담서?' 그렇게 물으면 대답은 이렇게 나온다. '이. 조깐 한 몬냥이데.'

표준말로 바꾸면, '아이가 공부를 상당히 잘 한다면서?' 라는 질문에, '예. 조금 하는 모양이데'라는 내용이다. 도대체 자기 자식에 대해 말하면서 ~하는 모양이데, 라니! 자식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인지 모르고 있는 것인지 의심할 정도의 말이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공부를 잘 하면 하는 것이고 못 하면 못 하는 것이지, '조금 하는 것'이라니. 그 정도를 알 수 없다.

하지만 같은 전라도 사람끼리는 그런 대화를 해도 하나도 오해가 생기지 않는다. 전라도 사람들에게는 자기나 자기 주변에 대해서 함부로 내세우지 않는 정서가 깔려 있다. 그러나 상대에 대해서는 과장이다 싶게끔 부추겨서 말을 한다. 내 자식이 공부를 잘 하면, 조깐 잘 하는 것이 되고, 남의 자식이 공부를 잘 하면, 무쟈게 잘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말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이상' '영판' '솔찬히' 등 막연한 정도를 나타내는 단어들이 많다. 그것은 어떤 것의 '정도'를 말할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상을 지칭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장소나 물건의 이름이 쉽게 떠오르지 않을 때, 전라도 사람들은 그냥 '거시기'라고 해버린다. '거시기 갔다 왔다' 라든지, '거시기 조깐 가꼬 와.' 이런 식이다. 대화의 맥락을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으면, 같은 전라도 사람이라도 이해하기 힘들 때가 많다.

하지만 이 '거시기'는 전라도 말과 전라도 정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어 중 하나이다. 또한 이 거시기라는 말은 아버지가 가장 즐겨 쓰는 단어이기도 하여, 나는 몇 년 전에 '거시기'로 시를 쓰기도 하였다.


고희의 언덕을 오르며 아버지는 거시기라는 말을 자꾸 내뱉는다 아버지에게는 아내도 아들도 거시기가 되고 염소도 경운기도 거시기가 된다 거기에 익숙해진 우리는 아야거식아 소리에 예예 대답을 한다 어떤 사람은 나의 이름이 거시기가 된 것이 우스워 웃기도 하고 형제들 여럿 있을 때 이구동성 대답하면 도대체 누가 거시기냐 묻기도 한다 이 거시기는 지독한 것이어서 소 밥 주고 오라는 얘기가 아버지 입을 거치면 거식아거시기거시기좀주고오그라이가 된다 아버지에게는 개똥과 하눌님이 거시기이고 모든 행위까지 거시기이다 거시기가 이 세상의 처음이고 끝인 아버지는 아무리 어려운 일도 거시기하면되재 그런다 마을의 골목길 포장 문제에서부터 남북 문제에 이르기까지 (졸시 '거시기' 전문)


이쯤 되면 지독한 거시기이다. 어느 지역 말을 이해하고 안다는 것은, 그곳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외국어를 배울 때도 단어만 알고서는 어렵듯이, 일정 지역에서 쓰는 사투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 사람들 생활 속으로 들어가야 가능할 것이다.

조금 전에 후배가 전화를 해서는, '그나저나 성이 댄참하요'그랬다. 요즘 내 일이 많다는 것을 알고 고생한다고 한 얘기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나의 답변은 '괜잖해!'였다. 하긴 이미 전라도 사람인데 어쩔 것인가.

그러나 전라도는 전라도 나름대로의 말과 풍토가 있듯이, 다른 곳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나는 대학 시절 경상도 친구 하나와 친하게 지내면서 그의 말을 의도적으로 배운 적이 있다. 나와는 전혀 다른 그의 말을 하나씩 배우고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그와 밀접해질 수 있었다. 말이 통하면 문제될 것이 별로 없는 게 인간 세상인 것이다.


이대흠 시인은 전라도 고향 내음을 더 가까이 전달하기 위해 홈페이지 리장다껌(www.rijang.com)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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